“맨발걷기는 행복입니다”…겨울 바다 누비는 ‘해피 바이러스’ [맨발에 산다] ④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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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시 박은영 씨]

중형버스 핸들 잡는 '라이방 멋쟁이'
오십 줄에 뜻하지 않은 암과의 동행

절망 속 허우적대다 맨발걷기 만나
몸과 마음 안정 찾으며 ‘새 삶’ 동력

"행복은 나눠야 제맛" 지역 모임 결성
주중 집 주변, 주말 바다서 ‘맨발 주행’

박은영 씨가 지난 14일 부산 기장군 임랑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에 살고 있는 박 씨는 겨울철 주말마다 부산의 바닷가를 찾는다고 한다. 김희돈 기자 박은영 씨가 지난 14일 부산 기장군 임랑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에 살고 있는 박 씨는 겨울철 주말마다 부산의 바닷가를 찾는다고 한다. 김희돈 기자

박은영(54) 씨의 SNS엔 고맙다, 감사하다, 행복하다는 표현이 넘쳐난다. 이런 식이다. “오늘 하루도 하늘을 볼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살아 있다는 건, 건강해서 일할 수 있다는 건, 맨발걷기를 할 수 있다는 건….” 특별히 기쁜 일이나 멋진 이벤트가 있어서가 아니다. 대단한 경사가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시 글이 이어진다. “이 소박할 것 같은 오늘이~ 건강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내게 주어져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그저 하늘을 볼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은영 씨의 사연이 궁금했다.

은영 씨를 처음 만난 곳은 송정해수욕장 백사장이었다. 부산의 해수욕장 일곱 군데를 맨발로 걷는 행사인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 네 번째 순서가 진행됐던 11월 9일. 백사장 구석구석 참가자들의 사연을 취재하던 중 알록달록 경광등을 얹은 노란색 통학버스를 몰고 달려온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은영 씨였다. 무르팍까지 걷어 올린 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발과 챙이 넓은 선 캡 아래 짙은 라이방을 착용한 얼굴의 건강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 네 번째 이벤트가 열린 11월 9일 부산 송정해수욕장에서 자신이 운행하는 통학버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박은영 씨. 박 씨는 당시 함께 활동하는 맨발걷기 동호회 회원들을 이 버스에 태워 송정으로 달려왔다. 김희돈 기자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 네 번째 이벤트가 열린 11월 9일 부산 송정해수욕장에서 자신이 운행하는 통학버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박은영 씨. 박 씨는 당시 함께 활동하는 맨발걷기 동호회 회원들을 이 버스에 태워 송정으로 달려왔다. 김희돈 기자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 김해지회를 이끄는 은영 씨의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직장인 출퇴근과 초등학교 유아반 아이들의 통학을 책임지고 있다. 송정 바닷가에 몰고 온 25인승 버스는 은영 씨의 일터인 셈이다. 오후 1시부터 행사가 시작된 그날, 경남 김해시에서 출발한 회원 20여 명은 은영 씨가 운전하는 노란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송정에 도착한 후 챌린지 참가와 자체 게임 등을 통해 단합을 다지고 오후 늦게 김해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이 훌쩍 흐른 지난 14일 오전, 찬바람이 제법 돌던 임랑해수욕장에서 다시 은영 씨를 만났다. 해수욕장 한쪽에 친 바람막이용 비닐 텐트 안에 모여 앉은 일행 6명이 맨발걷기에 앞서 삶은 달걀과 떡으로 요기하던 참이었다. 일이 없는 토요일, 회원 몇몇과 함께 바닷가 맨발걷기에 나선 것이었다.

“올 초였던 1월과 2월 겨울 바닷가를 두루두루 다녀 봤는데요, 여기 임랑이 바람 영향도 적고 제일 낫더라고요.” 맨발걷기에 빠진 지 4년째인 은영 씨는 겨울이면 주말마다 꼭 바닷가를 찾는다고 한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기를 써서라도’ 해야 하는 겨울철 루틴이다. 차가운 날씨에 굳이 바닷가를 맨발로 다니는 이유는 뭘까. 은영 씨는 “활성산소니 양전자니 음전자니 얘기를 많이 하지만, 이론을 떠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게 가장 확실한 동력”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내 몸이 바로 느끼기 때문”이란다.

박은영 씨 일행이 지난 14일 오전 부산 임랑해수욕장 백사장에 설치한 간이 텐트 안에 모여 있다. 이들은 간단한 요기를 마친 후 곧바로 바닷가 맨발걷기에 나섰다. 김희돈 기자 박은영 씨 일행이 지난 14일 오전 부산 임랑해수욕장 백사장에 설치한 간이 텐트 안에 모여 있다. 이들은 간단한 요기를 마친 후 곧바로 바닷가 맨발걷기에 나섰다. 김희돈 기자

은영 씨를 맨발걷기로 이끈 건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이다. 2021년 유방암 판정은 받은 은영 씨는 큰 충격에 빠졌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 막다른 길 끝에 선 것 같았다. 출구가 안 보이는 막막함에 우울증까지 시달렸다고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식이요법이나 마사지요법을 하고 비싼 비용을 들여 요양병원에 입원도 해 봤지만 쉽게 예전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은영 씨가 한 줄기 희망을 본 곳은 김해의 분성산 황톳길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질병이 일상을 흔들었듯이, 별 기대 없이 맨발로 디딘 황톳길은 은영 씨에게 새 세상을 열어 줬다. 신발을 벗고 맨땅을 디뎠을 뿐인데 머리와 눈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게 뭐지”하며 스스로 놀랐던 은영 씨는 그때부터 책을 읽고 동영상을 보며 맨발걷기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였다.

절망의 늪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면서 생각이나 생활 방식도 바뀌었다. 집착을 버리고 내려놓기, 단순하게 살기 등 마음 관리를 하면서 예민하던 성격도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일상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봉사하는 삶을 생각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2년간의 실천을 통해 맨발걷기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은영 씨는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총무에 이어 회장을 맡고 있다. 행복한 일상을 찾아준 ‘해피 바이러스’를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서란다.

주말뿐 아니다. 일을 해야 하는 평일 일과도 온전히 맨발걷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핸들을 잡아야 하는 시내버스 기사직을 내려놓은 은영 씨는 통학버스 기사로 변신했다. 오전 6시 집을 나서 직장인 출근과 아이들 등교를 돕고 난 후 오전 8시 40분께부터 맨발걷기를 시작한다. 아이들을 태우고 간 학교 근처나 봉황대, 해반천, 분성산 등 김해시 전역이 무대다. 식사는 미리 챙긴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오후 4시 아이들 하교를 끝내면 집으로 와 집안일과 저녁 식사를 끝낸 후 새벽에 출근시킨 회사원 퇴근 차량을 운행하려 다시 집을 나선다. 은영 씨가 직장인으로서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오후 9시. 이후엔 또 집 근처에서 맨발걷기.

박은영 씨가 지난 14일 부산 기장군 임랑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에 살고 있는 박 씨는 겨울이면 주말마다 부산의 바닷가를 찾는다고 한다. 김희돈 기자 박은영 씨가 지난 14일 부산 기장군 임랑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에 살고 있는 박 씨는 겨울이면 주말마다 부산의 바닷가를 찾는다고 한다. 김희돈 기자

대회 출전을 앞둔 운동선수의 훈련 스케줄 같은 일상이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즐기면서 하는 운동이다 보니 오히려 행복과 기쁨의 나날이라고 한다.

그런 은영 씨는 최근 두 개의 큰 선물을 받았다. 하나는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가 시행한 전문 지도자 과정 2급 자격증을 획득한 것이다. 정부(문체부) 승인 민간자격증 발급기관으로 정식 등록된 후 시행된 첫 시험에 응시해 98명의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무엇보다 은영 씨를 기쁘게 한 선물은 병원 검사 결과다. 2년 반 만에 시행한 검사에서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길래 이렇게 좋아졌느냐”는 의사의 말에 은영 씨가 한 대답은 “산과 바다를 맨발로 누비며 살았습니다”였다고 한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라이방 아래 은영 씨의 미소가 더 환하게 빛났다.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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