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그놈의 확신이 문제다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거울을 보고 글씨를 써 본 적이 있는가. 의외로 상하좌우는 좀 삐뚤삐뚤해도 그런대로 수월한 데 비해, 앞뒤로는 정말 방향조차 어렵다. 사실 거울이 왜 하필 좌우만 뒤집어놓는지는 과학자들에게도 상당히 진지한 질문이었다. 하필 우리의 눈이 좌우로 배치돼 있으며, 우리의 몸이 대체로 좌우 대칭적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조차도 몸의 외부와 내부는 전혀 다르다. 신기하게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은 좌우 대칭인데, 이는 지구중력 내에서 위아래는 차별적이되 좌우는 몸의 균형을 잡기가 쉽고 움직임이 유리하도록 대칭적으로 진화한 결과라고 한다. 원통형 생물도 있긴 하지만, 고등생물에서는 보통 앞뒤가 모양이나 기능면에서 분명히 다르다.
시간에 대해서는 대칭을 얘기할 수가 없다. 공간과 달리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는 종종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른바 주기성 때문인데, 매년 같은 계절이 돌아오면 지난해와의 비교를 통해 다가올 내년을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지능과 기억을 가진 우리들의 경우, 나이가 들면 어린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기의 젊은 날을 보기도 하고, 부모가 되면서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사회적 합의 무시 자기 확신
국민 지켜온 민주주의 위협
헌법과 그 정신이 최후 보루
심지어 우리는 평생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직시한 적이 없다. 직시할 수도 없다. 거울이나 사물, 다른 이의 눈을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반전된 나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내 모습과 실체는 모르면서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보고 알아간다. 내게 보이는 세상 또한 정작 대상의 실체보다도 내 (색)안경과 방향, 심지어 때와 장소, 내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세상의 실체라고 착각한다. ‘나는 회의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마따나, 세상에 확실한 것은 정녕 없으며, 오로지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야말로 존재의 출발점이다. 생각하는 사람, 철학의 출발점이다. 비록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무척 슬프게도, 대학에서조차 사라지고 있지만, 이것은 과학을 비롯한 모든 근대 학문의 시작과 근간이다.
이렇게 진실은 의심으로부터 발현되며, 거짓과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모두 스스로 자신감과 확신을 희구한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더욱더 그렇다. 오랜 세월 확신에 찬 ‘센’ 사람들의 승승장구를 부러워하며 어려서부터 하나의 정답만을 교육받은 결과다. 이른바 확신은 잘나가는 사람들의 ‘성공 코드’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확신 앞에서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낙오자가 되고 사회적 ‘루저’가 된다.
누구나 자신감과 확신을 희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와 동시에 함정에 빠지기 일쑤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 확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단서가 되고, 이에 반하는 일들은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나중엔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그럴듯한 이야기만 귀에 들어오며 한층 나의 확신을 더해준다. 분명히 아닌 것 같은 일이 일어나도 확신을 정당화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심지어 그것은 내 자존심이 된다.
그래서 불안감을 되잡아 밀어붙인다. 무리수는 더 큰 무리수를 부르고, 범죄를 저지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게 된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아주 섬뜩하다. 무엇이든 이런 확신을 만나면 그것은 우리가 대적해야 할 가장 확실한 괴물, 비(非)진리가 된다. 그렇게 진실은 결코 자신만의 좁은 식견과 일천한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에 존재할 수 없다. 확신은 모든 것의 종지부다. 요지부동, 고집불통, 파시즘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저마다의 확신과 불소통, 회의론이 존재하는 불확실성 내에서 그나마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은 합의를 통하여 성립된 국민의 주권 덕분이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의와 원칙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인 헌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절대적 선악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일반화하여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용납할 수 없다는 확신이 서는 순간, 공존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다양한 견해를 갖는 주권자로서 합의된 규범 내에서 상호존중과 처벌이 엄격하게 적용될 때, 우리는 공존이 가능한 평화로운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공짜, 비밀 그리고 정답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들은 제각기 따로 의미가 있겠으나, 작금 우리의 상황은 이것들이 모두 연결돼 우리 모두가 저항하며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래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확신범들이 여전히 국민들이 피땀으로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헌법과 그 정신이 엄수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