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대러 적대 정책 고수, 우리만 손해다
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재취임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북한군 파병 논란을 뒤로하고, 쿠르스크와 돈바스에서 서구와 러시아의 진영 싸움이 한층 거세졌다. 겉으로 보면 세계가 파국을 향해 달리는 듯하다. 러시아 본토를 장거리 미사일로 공격하겠다는 젤린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요구를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이 끝내 수용하였고, ‘한반도 밖 금지 정책’에서 벗어나 얼마 전에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인지뢰 봉인까지 풀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을 겨우내 타격하겠다고 나오고 있고,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새 중거리 미사일로 우크라이나 서부까지 부수어댄다. ‘3차 세계대전 위협론’까지 나도는 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양측이 조금의 영토라도 더 확보해서 앞으로 벌어질 종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협상 카드’일 수 있다.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이 난항을 겪던 1952년 10월의 철원 ‘백마고지’에서도 이랬다. 우크라이나의 전투가 거칠어지는 와중에서도 각국은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서로 물밑 대화에 나서고 있고, 새 상황에 대처할 대응팀을 가동 중이다.
종전 치닫는 ‘우크라 전쟁’
각국은 이익 극대화 위해
물밑 대화 등 대응책 부심
한국 정부 “파병” 운운하며
위기 고조 정책 놓지 않아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그런데 한국 정부만 우직하다. 우리 정부의 태도는 2년 10개월 전의 전쟁 발발 초기나 종전협상안이 난무하는 지금이나 시종일관 같다. ‘대러 적대 정책’, 그것 하나뿐이다. “약한 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돕는 게 인지상정”이라거나 “러시아만이 악의 축”이라는 게 우리 대통령의 거듭되는 국제 인식 수준이고, 이를 말리는 외교·안보 참모진도 없다. 이러니 외교·안보 측면에서 국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한민국은 당사자도, 유럽 국가도, 나토 회원국도,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가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무슨 ‘게임 체인저’도 아니다. 그런데도 복합적인 전쟁 배경과 수시로 달라지는 상황과 관계없이 줄곧 한쪽을 악마화하여 배척한다면, 냉정한 국제사회에서 과연 국가와 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계속하여 담보할 수 있을까. 워싱턴마저도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며 크렘린과 ‘휴전선’ 대화에 나선 마당에 우리만 ‘러북 야합 단계를 봐가며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 직접 공급 검토’ ‘파병 용의’ 등 으름장 수위를 계속 끌어올리면 결국 어쩌자는 걸까. 이럴수록 우리만 손해가 난다. 국가, 국민, 미래 세대가 고루 피해를 본다.
2022년 3월 7일 러시아로부터 ‘비우호 국가’로 지정된 대한민국은 계속된 대러 강경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자동차 공장을 지난해 말 1만 루블(약 14만 원)에 빼앗겼다. 대한항공도 지난 10월에 2년간의 소송 끝에 1800억 원대의 과징금 폭탄을 부과받았다. 이유는 2021년 독일로 가던 KE259 편이 경유지인 모스크바에서 공항 세관의 날인을 받지 않고 이륙했다는 것, 그것 하나다.
북극만 해도 지구 환경 변화로 얼음이 녹아 종전의 5개월에서 7개월로 항로 이용 기간이 늘었다. 온난화로 인한 지구적 재앙의 현장인 북극항로가 ‘엉뚱하게도’ 부산엔 지금까지의 컨테이너 환적항 정도가 아니라 고부가가치 창출 항으로 도약할 기회를 주고 있다. 그렇지만 북극의 55%를 차지하고 8개국 북극이사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센 러시아를 계속 적대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기회가 통째로 날아가게 생겼다.
1990년대 북방정책 시행 이후 부산 중앙동 근처에 많은 대러 무역회사, 선박 대리점, 해운용품 공급사들이 생겨났고, 러시아학과를 졸업한 적지 않은 인재들이 그곳에서 회사를 운영하거나 근무하고 있다. 이들이 정부의 불균형 외교로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된다. 한국 기업은 중앙아시아의 가스전 개발 등 국책 프로젝트에 러시아의 ‘가스프롬’ 등 국영 기업을 끼지 않고선 협력업체로 참여하기 힘들다. 영원히 계속되는 전쟁이라는 건 없으니까 언젠가 포화가 멎으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우리 기업이 들어가서 복구사업도 해야 한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이 모든 장밋빛 기회를 전부 포기할 것인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적의 무리를 소탕하여 지구를 지키겠다”라는 ‘태권 브이’와 ‘마징가 제트’식 접근만으로는, 적색 공포증을 벗지 못한 냉전적 사고와 극우적 시각만으론, 21세기를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다. 성숙한 접근이 이제부터라도 필요하다. 미국도 일본도 그리고 나토의 서유럽도 자기 밥그릇은 챙겨가면서 처신한다. 이탈리아의 통일과 번영을 꿈꾸며 1532년에 새로운 정치사상서 〈군주론〉을 펴낸 마키아벨리는 “국가 지도자는 나라를 곧이곧대로 끌고 가선 안 된다. 나라에는 ‘더 큰 도덕’이 있고, 때론 ‘부도덕’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켜낸다”라고 설파했다. 손익계산을 따지지 않는 천진난만한 대러 적대 정책은 빨리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