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계엄 폭거 무혈 진압’을 이룬 나라
위헌적 ‘친위 쿠데타’ 6시간 만에 해제
국회 여야 표결 등 헌법 시스템 작동해
주권자 국민, 국회 집결 비상계엄 막아내
유혈사태 비화 피한 MZ 군인들 성숙함
민주주의 전통, 폭력으로 위협할 수 없어
70년 축적한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되길
변 형! 한국에서 계엄령이 선포되던 3일 자정. 미국 LA에서 걸려 온 “지금 2024년입니다. 왜들 이러십니까”라는 변 형의 울먹인 전화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LA는 새벽이었지요. 올해 초 가족여행에서 변 형 부부와 함께한 LA 베벌리힐스의 점심 식사가 떠오릅니다. 30년 이민 생활에서 세계 10위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모국 덕분에 이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에 뿌듯했습니다. 그때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던 K팝이 귓가에 여전한데, 난데없이 CNN에 쏟아지는 비상계엄 뉴스에 그 모든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변 형! 저는 이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친위 쿠데타’에서 한국의 헌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계엄 선포 직후 여당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조차 “헌법 질서 내에서 문제를 바로잡겠다”라고 밝혔습니다. 헌법 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국회 본회의장 입구까지 계엄군이 들이닥치고 보좌진과 직원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국회 담을 넘어 들어온 우원식 국회의장은 안건 상정을 기다려 절차를 모두 밟은 뒤 계엄 선포 두 시간 만에 여야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 표결로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헌법에 따라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습니다. ‘친위 쿠데타’ 과정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여왕’으로 기능했습니다.
두 번째는 주권자 국민의 높아진 수준입니다. 법조문에 불과할 수 있던 자유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대로 작동시킨 힘입니다. 국회 앞에 집결한 국민은 군경과 그들의 차량을 저지하며, ‘1980년대 회귀’를 막아냈습니다. 주권자가 계엄 폭거를 무혈 진압한 것입니다. 5일 NPR(미국공영라디오방송)마저도 톱뉴스로 “한국 국민은 2024년에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공산주의 위협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시도에 대해 거부하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한 일본인은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와닿아서 울컥했다”는 댓글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우리 국민은 철수하는 계엄군에게 “고생했다”라며 박수로 배웅하기까지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성숙한 군인들입니다. 비열한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우리의 아들들을 정권 보호의 꼭두각시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비록,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무엄하게 국회 유리창을 깨고, 군홧발로 짓밟았지만, 계엄군이라는 완장에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거나,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광주민주항쟁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군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징벌 등 학습효과와 트라우마, MZ세대로 구성된 대한민국 청년 군인의 시민적 성숙함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 계엄군은 복귀 도중 무리를 이탈해 시민들에게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외신에서도 “군대와 경찰이 효과적으로 집행하지 않아, 계엄 시행 시도가 몇 시간 만에 실패했다”라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물론, 내란죄 등에 대한 역사적 후과는 철저히 물어야겠지만, 더 이상 군대가 정치에 개입해서 독재자가 나올 수 없는 국가란 점은 확실해졌습니다. 전후 70년간 축적한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입니다.
변 형! 이번 사태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이 쌓은 민주주의 전통, 헌법 시스템은 어떤 폭력과 위협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뉴노멀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789년 프랑스 평민 대표들의 ‘테니스 코트 서약’이 결국 대혁명을 일으키고, 수백 년 동안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면, 국민과 헌법의 힘으로 막은 ‘6시간 비상계엄’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브랜드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민주주의의 후발국 모두로부터 ‘배우고 싶은 나라,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반전의 기회입니다. 저는 한국인 특유의 회복탄력성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내란죄 수사, 대통령 탄핵 표결이 진행됩니다. 거리에서도 국민이 활발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광장의 정치가 열릴 겁니다. 시끌벅적하겠죠. 그 와중에 우리가 얻을 것은 대한민국 시스템은 정치생명 유지를 위해 계엄을 선포하는 한낱 독재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 조국은 발전했습니다.
변 형! 사설이 길었습니다. 내년 봄, LA의 약속대로 가족과 함께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을 걷는 날이 기대됩니다. 한라산 동백길에서, 겨울을 뚫고 피어나는 동백처럼, 온갖 간난을 이겨내는 대한민국, 두 가족의 미래를 이야기할 생각에 가슴이 설렙니다. 잘 익은 막걸리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평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