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시국선언과 계엄, 그 결말
민주주의 지켜낸 역대 시국선언들
근래 각계각층에서 또다시 쏟아져
“윤석열 정권 퇴진하라” 한목소리
비상계엄 선포·해제 이후 더 거세져
올해 8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윤석열 정권의 ‘계엄 시도’ 의혹을 제기했다. 김 최고위원은 “(김용현 경호처장의) 국방부 장관으로의 갑작스러운 교체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는 것이 저의 근거 있는 확신”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당시 대통령실은 “괴담 선동”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밤늦게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왜 그랬을까.
■지성들의 잇단 시국선언
윤 대통령은 국회의 예산 삭감과 검사 탄핵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보다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근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이다. 최고 지성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다.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은 지난 10월 28일 가천대 교수노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여 인원은 현재까지 70여 개 대학에서 4000명이 넘는다. 이들의 시국선언문에는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 해소, 특검 도입 등도 있지만 윤 대통령의 퇴진이 주로 언급됐다. 서울대 교수·연구자 525명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윤 대통령이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야 한다. 한국 사회의 장래를 위해서 그의 사퇴는 필연적이다”라고 선언했다.
교수들이 앞장서니 대학생과 졸업생도 시국선언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경북대, 국민대, 강원대 등 전국으로 확산 중인데, 고려대에서는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대자보가 등장해 “대학은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옳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 왔다”며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시민과 예술·종교계까지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은 시민사회와 종교계 등 전방위로 뻗어가고 있다. 대전에선 퇴직 교사들이 “국정농단 세력이 우리의 제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부끄럽다”며 “모든 권력 남용과 국정농단의 근원인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공감연대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는 지난 3일 부산, 서울, 광주 등 전국 7개 장소에서 1067명이 서명한 ‘윤석열 대통령 퇴진 요구 시국선언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같은 날 해병대 예비역들이 ‘채 해병 사건’과 관련해 윤 대통령 탄핵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행위예술가들이 지난 2일 ‘윤건희 정권을 파면한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재미 한인 교수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도 온라인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지식인 396명이 지난달 26일 “윤 대통령에게 어떠한 가능성도 기대하지 않는다”며 윤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그에 앞서 지난달 7일 부산에선 송기인 신부 등 원로 인사 등 214명이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사제 1466명은 지난달 28일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내고 “헌법 준수와 국가 보위로부터 조국의 평화통일과 국민의 복리 증진까지, 대통령의 사명을 모조리 저버린 책임을 물어 (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자”고 주장했다.
■민주화 지켜낸 시국선언들
과거에도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은 현대 한국사의 주요 고비마다 터져 나왔다. 이승만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지식인, 학생, 예술인, 종교인 등의 시국선언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를 이끌어내고 지켜낸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인 예다. 이날 시국선언이 발표되면서 이틀 뒤인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했다. 1986년 3월 28일 고려대 교수 28명은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시국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언론·사상·표현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후 5월 중순까지 29개 대학에서 785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이어갔고, 이는 ‘6월 항쟁’을 이끄는 데 큰 힘이 됐다. 그 뒤에도 시국선언은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경종과 방향타 역할을 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2년 반 동안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과 주변을 향한 세간의 비판엔 귀를 닫고 ‘오직 나만이 옳다’는 식으로 국정을 밀어붙였다. 검경 등 사정기관은 물론 군과 방송 등 주요 보직에 자기 사람들을 앉혔으니 무서울 게 없었을 듯하다. 그러나, 짐작건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시국선언은 무시하기 힘들었을 테다.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센 민심을 어찌 견디겠는가. 지난 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어쩌면 그런 다급함에서 나온 최후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계엄 따위로 막을 수 없다
민심은 준엄하다. 계엄 따위로 어찌할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도 시민의 저항을 계엄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억압하려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4·19 혁명’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마항쟁’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계엄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계엄에 기댄 정권의 말로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는 더욱 초라해 불과 6시간 만에 좌초했다. 하마터면 유혈 사태로 번질 뻔했던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가 국회의 신속한 해제 결의로 차단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는 결국은 시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날 긴박했던 상황에서 서울 시민들은 국회로 나가 계엄군을 막아섰고, SNS로 소식을 전했고, 전국의 시민들은 가슴을 졸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당일 부산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계엄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밤새 눈뜨고 있었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예리코 성의 함성?
시국선언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부산대 교수회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4일 발표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르고 있다. 종교계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들끓고 있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는 4일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를 바라보는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내고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사과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개신교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무릎 꿇어 사죄하고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불교 역시 교무단 명의의 성명을 통해 “배은 중생 윤석열은 마땅히 하야하거나 탄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계에선 불교인권위원회가 “윤석열 대통령 등은 반드시 국민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규탄했다. 이렇듯 이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건 단 하나, ‘윤석열 퇴진’이다. 바야흐로 예리코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 군의 함성을 방불케 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