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책 사러 서점에 ‘오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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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에
국내 서점가에도 수요자 몰려
오랜 불황 도서 시장에 ‘단비’

이미 그전에 독서 트렌드 불어
“유별난 허세” 냉소하기보다
옹호하고 포용하는 자세 필요

서점 ‘오픈런’을 보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픈런은 물건을 구매하려는 유효수요가 과다할 때 상점이 문을 열기 전 아침 일찍부터 수요자들이 물건을 사고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젊은 세대에게 오픈런은 생소하지 않다. 예컨대 인기 브랜드의 한정판이 출시되는 날이면 새벽부터 매장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은 유행에 앞서가는 ‘트렌드 세터’의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 백화점에서 근무했던 필자에게도 오픈런은 전혀 생소하지 않다. 백화점의 일부 명품매장은 높은 수요로 상시 물량 부족을 겪는 탓에 오픈런을 해야만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아마도 누가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달려가는 오픈런을 상상해 본 적이 있겠는가!

사실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오픈런이 매우 반가운 일이다. 오픈런 줄을 선 사람들은 대다수가 구매를 확정한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살지 말지 모르겠는데 일단 구경만 하려고 새벽부터 매장에 줄을 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준비하고 나온 마음가짐에는 기필코 내 손에 넣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오픈런으로 이뤄지는 판매는 매장의 분위기나 직원들의 응대 서비스보다도 일단 고객이 원하는 물건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일부 대형서점들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영업시작 전부터 길게 줄지어 선 오픈런을 마주했다. 이에 대해 교보문고 종로점 문학파트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입사 이래 오픈런은 처음”이라고 놀라움을 표했다. 개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 재고가 순식간에 동이 났고 서점들은 ‘품귀’ 현상에 추가 재고를 퀵으로 긴급배송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주 주말 파주출판단지의 인쇄소들은 평소보다 50배 넘는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철야 근무에 돌입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근래 출판업계에 이렇게 활기가 돌던 때가 있었던가. 매년 독서인구는 감소세를 겪어왔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며 성인 10명 중 6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답했다. 올해만큼은 노벨상을 계기로 적어도 한강 작가의 작품은 몇 편이라도 읽게 될 것 같아 평균이 수직 상승할 듯하다. 오랜 불황으로 침체했던 도서 시장에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동시에 영상매체 소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활자를 읽는 새삼스러운 시간이 독서활동을 기억하고 환기하는 의미로서도 무엇보다 소중할 것 같다.

이미 젊은 세대에게는 지난해부터 독서와 관련한 트렌드가 불어오고 있었다. 글자(Text)와 ‘힙하다’(Hip)의 합성어인 ‘텍스트힙’은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트렌드로 SNS를 통해 자신이 읽는 책을 소개하거나 좋았던 책의 일부 구절을 필사하거나 독서모임에 참여한 경험을 공유하는 활동들로 이뤄진다. 또한 손에 든 책으로 패션을 완성하는, 책(Book)과 ‘세련된’(Chic)의 합성어인 ‘북시크’ 트렌드도 생겨나고 있었다. 자극적인 쾌락의 도파민을 추구하는 대신에 독서를 통해 즐거움을 찾는, 독서와 도파민을 합친 ‘독(讀)파민’ 트렌드까지 더해져 제대로 독서 붐이 일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오픈런을 보고 유난스럽다고 혹은 청년들의 허세 부림이라고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보여주려는 욕구만 너무 앞선다면 문제겠지만 개인적으로 냉소보다는 이러한 문화를 오히려 포용하고 옹호하고 싶다. 지적 허영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다. 실속이 없고 필요 이상의 호사라는 뜻을 지닌 ‘허영’은 단번에 부정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허영은 무지했던 혹은 변화하는 다양한 가치와 문화,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기에 배움의 열정을 갖게 한다. 화학분석이 공부하는 마음에도 가능하다면 지적 허영심을 조금씩은 검출할 수 있을 것이다.

영예로운 노벨상 수상작이 궁금해서 책장을 펼쳐보고 자신만의 감상을 가져보는 것과 무관심한 채로 지나치는 것 사이에는 문화적 경험의 폭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태도의 누적은 곧 개인의 인문학적 교양으로 나타난다. 교양은 허영보다는 품위에 가까워 보인다. 사회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친 취향과 소양을 갖추는 과정이다. 이는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기준과 기대를 통해 우리를 성장하는 존재로 이끌며 삶을 윤택하게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적 허영을 채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독서다. 감사하게도 이번 가을 한국은 한껏 높아진 자부심과 함께 지적 낭만을 만끽하는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문학작품을 원서로 읽는 축복의 여운이 서점가에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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