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 칼럼] 폭로 판 키우는 명태균, 꼬리 감춘 대통령
논설위원
명 씨 연일 폭탄급 폭로, 국민 충격
김 여사 관련 의혹 갈수록 더 커져
꼬이는 해명에 대통령 부부는 침묵
여당 대표, 김 여사 활동 자제 요구
윤 대통령도 이젠 물러설 곳 없어
국정 위해서도 분명한 입장 내놔야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는 철인(哲人)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철인은 어떤 사람인가. 현실을 인식하고 국가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통치자인 철인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있는데, 사유 재산은 물론 자기 가족도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허용하면 개인적인 욕망이 생기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부패로 이어져 국가의 내적 통합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통치자가 되려면 사유 재산이나 가족과 같은 기본적인 욕망은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통치자의 조건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게 제시한 까닭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통치자의 개인 욕망은 통제돼야 함을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변방의 잉글랜드를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엘리자베스 1세가 영감을 받은 부분도 이 대목이라고 한다. 여왕은 평생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국가 경영에 헌신했다.
〈국가〉의 통치자 조건은 물론 지금처럼 가족의 가치가 절대시 되는 시대에는 비현실적이어서 공감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비웃는 듯한 비현실적인 일이 통치자를 중심으로 버젓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요즘 우리 현실에 비춰 보면 이를 그렇게 비현실적인 조건으로만 여길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한다. 통치자에게 가족은 단속하고 또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정치 브로커인 명태균 씨의 폭로로 드러난 영부인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여러 의혹을 보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통치자에게 왜 그토록 엄혹한 조건을 바랐는지 그 일단이나마 얼추 짐작이 간다. 정말이지 지금 국민들은 날마다 그 강도를 더해 가는 명 씨의 폭로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다. 사실 여부야 수사나 검증이 필요하다고 쳐도 연일 폭로되는 내용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이다. 안 그래도 김 여사와 관련된 의혹이 한두 건이 아닌 마당에 대선 경선은 물론 현 정부 출범 과정에서 김 여사의 간여 또는 입김이 곳곳에 미쳤다는 폭로는 과연 국민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누구인지조차 헷갈리게 할 정도다.
대통령실은 명 씨의 카톡 대화 중 ‘오빠’가 윤석열 대통령이 아닌 친오빠라고 해명하지만 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국민 다수는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거니와 설령 친오빠라고 해도 국정 개입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앞으로 명 씨가 어떤 내용을 계속 폭로할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윤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크게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야권의 탄핵 협박이 아니어도 국정에 관한 대통령의 지시가 말발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일각에선 이미 이런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게다가 현재 대통령 부부와 명 씨 사이의 논란 주도권은 누가 보더라도 명 씨가 쥐고 있다. 명 씨는 1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인생 한 번 사는데 재미있게 살면 되지, 남 의식을 왜 하냐. 대통령 때문에 눈치 봐가면서 할 거 안 하냐”며 “자기들이 한 만큼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이 자신을 사기꾼 취급하고 ‘사적 통화’ 운운한 것에 대해서도 “그럼 공적 통화, 대통령하고 한 걸 까야 되겠네”라며 “진짜 최고 중요한 것만 까도 한 200장 이상 된다”며 경고를 날렸다. 이쯤 되면 누가 칼자루를 잡고 있고, 누가 칼날을 쥐고 있는지 모를 사람은 없을 듯하다. 명 씨의 당당하고 즐기는 듯한 모습에 비해 대통령실은 군색한 해명으로 오히려 의혹만 더 키우고, 당사자인 대통령 부부는 아예 침묵 중이다. 국민들은 직감적으로 대통령이 코너에 몰렸다는 것을 안다.
명 씨의 잇단 폭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김 여사 대외 활동 중단과 대통령실 인적 쇄신 요구, 지지율 바닥 등 지금 어느 하나라도 윤 대통령에겐 유리한 게 없는 국면이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외부에 떠밀려 결단해야 하는 수순으로 몰리는 형국이다. 꼬리를 감춘다고 몸통까지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윤 대통령이 결단하는 수밖에 없다. 바뀌어야 하고 또 바꿔야 한다. 한 대표의 요구가 아니어도 국정과 대통령실 쇄신은 오래전부터 대다수 국민이 요구하고 바란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기로 호가 난 윤 대통령이라도 지금 상황에선 이 외에 더 나은 길이 있을 성싶지 않다. 김 여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사람이 해결책으로 내놓은 방안이 무수하다. 눈앞의 뻔한 길은 놔두고 자꾸 다른 곳으로만 가려고 하니 그게 매양 발걸음을 꼬이게 한다. 그 발걸음이 꼬이니 국정도 민생도 어느 것 하나 비틀비틀하지 않은 것이 없다.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