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망 쪽지 품고 다니던 무연고자 “연결 되니 이젠 안심” [연결:다시 쓰는 무연고자의 결말]
지난달부터 동구 ‘해피엔딩’ 사업
쪽방촌 등 무연고자 25명 참여
죽은 후 연락할 지인 사전 지정
영화숙 피해자도 “걱정 덜었다”
전문가 “시 차원 운영 조직 필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쪽지라도 써서 붙인 거죠. 죽고 나서 연락이 간다니 다행입니다.”
지난 24일 〈부산일보〉 취재진과 만난 부산 동구 쪽방 주민 이주형(가명·65) 씨는 휴대전화 케이스에 테이프로 붙인 작은 쪽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쪽지엔 자신의 이름과 10년간 알고 지낸 교회 장로의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이 씨는 최근 동구청의 ‘해피엔딩 장례’ 사업에 참여해 장로가 장례 주관자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작성했다. 구청은 이 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장로에게 연락해 이 씨의 사망 사실을 알리고 장례 주관 의사를 묻게 된다.
이 씨는 비상연락망 쪽지뿐만 아니라 그동안 모은 장례비와 집 보증금 액수, 원하는 재산 처리방식 등 중요한 정보를 적어둔 종이를 가방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 가족과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인 그는 죽음 이후 주변인에게 소식이 전달되지 않고,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사후를 걱정했다.
이 씨는 “10여 년 전 회사 부도로 빚이 생기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노숙 생활 끝에 지금은 혼자다”며 “언제 어디서 갑자기 죽을지 모르고, 설령 갑자기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내 흔적을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대비해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종이를 잘 들고 다니는 게 최선의 노력이었는데, 이젠 죽고 나서 지인들에게 연락 갈 방법이 생겨 다행이다”고 말했다.
■한 달 만에 25명 ‘연결’ 원했다
30일 부산 동구청에 따르면 이날까지 ‘해피엔딩 장례 지원사업’에 지역 주민 25명이 참여했다. 동 행정복지센터, 지역 복지관 등을 통해 가족관계가 단절된 주민들에게 홍보가 이뤄졌고, 원하는 주민들은 사전 장례의사 관리 신청서를 작성했다. 구청은 신청 목록을 관리하다, 이들이 사망 후 무연고자로 분류되면 신청서 내용을 토대로 장례 주관자나 유언 집행자, 비상연락망 등에 사망 소식을 알리게 된다.
쪽방 주민들끼리 서로를 장례 주관자로 하는 신청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주민과 서로 장례 주관자가 되어주기로 한 박정훈(가명·63) 씨는 “한 지붕 아래 지내는 가족 같은 사이다”며 “우리의 사이를 증명하는 서류가 생긴 것 같아 뿌듯하고, 마지막을 챙길 수 있게 돼 든든하다”고 말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도 동구에 거주하는 피해자 박경제(69) 씨와 함께 구청을 찾아 신청서를 작성했다. 협의회는 무연고 사망이 우려되는 피해자의 장례를 챙기기 위해 공영장례 위임장을 작성하고 유언장을 준비해 왔다. 협의회는 이런 서류를 마련하더라도 사망 여부를 즉시 알 수 없다는 점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는데, 사전에 장례 의사를 남겨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며 안도했다. 협의회 손석주 대표는 “다른 구에 거주하는 피해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부산시 전체로 확대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복지망 연계·공동체 회복 수반돼야
전문가는 무연고 사망이 우려되는 취약 계층의 생전 의사를 사전에 확인하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런 시도가 정착하려면 기존 사회복지 체계와의 유기적 연계가 필수라고 조언했다. 또 지역사회 내 관계 회복과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인식 향상이 동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라대 초의수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앞으로 고독사와 무연고사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제는 존엄한 죽음도 복지의 기준선 안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며 “공영장례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안에 무연고 사망 등에 관한 분과위원회를 둬 기존의 사례 관리와 연계해 생전 연결을 돕는다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또 취약 지역을 중심으로 주민공동체 회복 노력도 필요하다”며 “관계 회복을 위한 사회적 처방이 이루어지려면, 서울시 고독사 지원센터처럼 실질적인 역할을 해내는 컨트롤 타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존엄사 교육 등 문화적 접근도 중요하다. 초 교수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 탓에 사후를 미리 대비하자고 무작정 접근하면 거부감을 부를 수 있다”며 “유언 작성, 자서전 쓰기 등 교육 후 죽음에 대한 대비를 제안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동구청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조심스러운 사안인 만큼 복지 대상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생활지원사 등 기존 복지망과 연계해 제도를 안내하고 있다”며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장수 사진 촬영, 유언장 작성 교육도 진행할 계획이고 앞으로 시범사업이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