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빨간 구두' 연대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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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1963년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뭇사람을 설레게 했던 가수 남일해의 노래 ‘빨간 구두 아가씨’는 발표와 동시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쾌한 리듬과 낭만적인 이미지 속에서 ‘빨간 구두’는 세련됨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여성들 사이에선 빨간 구두를 신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심지어 빨간 구두 품절 현상까지 일어났다.

가톨릭에서 빨간 구두는 권위와 신성을 상징한다. 금 십자가 목걸이와 레이스가 달린 사제복과 함께 교황을 떠올리게 하는 표식이다. 그 기원은 고대 로마와 비잔틴제국에 닿아 있다. 당시 붉은색은 황제와 황후,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사라진 뒤 그 상징성은 교황에게 남았다. 이후 교황 비오 5세는 과도한 권위 이미지를 덜기 위해 상징색을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모두 바꿨다. 그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바로 교황의 빨간 구두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빨간 구두가 등장한다. 가난한 구두장이 노파가 카렌에게 준 투박한 구두와 공주처럼 화려한 구두다. 전자는 나눔과 돌봄, 후자는 소유의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카렌이 어머니의 장례식 날 받은 빨간 구두는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전하는 따뜻한 표식이다.

2009년 멕시코 예술가 엘리나 차우베트는 시우다드후아레스 거리 위에 빨간 신발을 늘어놓는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사람 없이 남겨진 신발들은 가정폭력으로 희생된 여성들을 추모하고 약자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것은 “더는 침묵하지 말라” “보이지 않는 폭력을 드러내라”는 촉구였다. 이후 붉은 신발은 전 세계 가정폭력과 여성폭력 반대의 상징으로 확산됐다. 최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아테니움 콘서트홀 계단에도 이런 추모의 빨간 구두가 놓였다. 이 나라에서는 매주 여성 1명이 가정폭력으로 숨질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이제 가정폭력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구 ‘캐리어 시신’ 사건에서도 피해 여성이 한 달 가까이 폭행을 당하고도 치료받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가정폭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피해자가 사회나 가정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곧 가정의 달 5월이다.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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