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호르무즈 봉쇄와 국가 영속성의 지혜
이동규 동아대 대학원 재난관리학과 책임교수
유조선 발 묶여 공급 단절 생존 위협
임기응변 대응 아닌 제도 개선 필요
비축 범위 확대 1년 치 이상 확보를
국가 영속성 협의체 조성 서둘러야
에너지 소비 구조 근본적 체질 개선
배분 우선순위 법적 근거 마련하길
중동의 혈류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세계 경제는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공급망의 ‘실존적 단절’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유조선과 컨테이너선들이 페르시아 만에 발이 묶였고, 두바이유 가격은 폭주하고 있다. 국내 석화 공장은 나프타 공급 불안으로 가동 중단 위기에 처했고, 이는 종량제 봉투 품귀와 페인트 가격 폭등이라는 생활 밀착형 재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초 원자재 수급 불능에 직면한 영세 업체들의 조업 중단은 이제 국가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공급망 쓰나미’가 되어 우리 삶을 정조준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개별 부처의 파편화된 임기응변을 넘어, 대규모 비상사태 시 국가 핵심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 영속성’ 체계를 근본부터 점검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이미 ‘국가와 정부의 셧다운’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경험했다. 2020년 팬데믹에 의한 초국가적인 공급망 마비 사태 당시, 정부는 총 250조 원 규모의 비상 재정과 금융 지원 패키지를 긴급 투입하며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성급한 행정과 정책 학습의 부재는 더 큰 화를 불렀다. 2021년 요소수 대란은 당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97%에 달하는 공급망의 치명적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2년이 지난 뒤에도 의존도는 여전히 92%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용 효율성이라는 논리에 밀려 어렵게 마련한 ‘학습된 기제’가 다시 ‘망각된 교훈’으로 퇴보하고 만 셈이다.
최근 UAE가 한국을 ‘원유 최우선 공급 대상국’으로 지정하고, 긴급 도입 물량을 확정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면의 전략적 속내를 냉철히 간파해야 한다. 이는 에너지 전환기를 맞아 한국의 정제 기술과 방산 역량을 자국 인프라에 결속시키려는 고도의 포석이다. 우리는 이를 역이용해 자원 보유국에는 기술을 제공하고, 자원 빈국과는 공동 비축 및 에너지 공급 안전망을 형성하는 ‘기술-자원 패키지 외교’를 국가 영속성의 핵심 열쇠로 삼아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수급 불균형의 ‘약한 신호’와 실제 공급망 단절 사이의 ‘시차’이다. 유조선 운임 폭등에도 산업 현장의 체감은 아직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 균열은 물류망을 타고 증폭되어 비축분이 소진되는 임계점에 이르면, 시장과 산업 현장에서 폭발적인 연쇄 셧다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 수출입의 99%를 담당하는 해운 물류망의 기능적 불능이 발생하면 부산항과 울산항을 기점으로 하는 국가 물류 체계 전체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국가적인 위협이 된다. 특히 글로벌 선사들의 항로 이탈과 체선료 폭등으로 이어져 부산항의 컨테이너 회전율을 급격히 떨어뜨릴 수 있다. 이는 지역 중소 수출 기업들의 경영을 위협하는 동시에, 국가 경제 전체를 세계 공급망에서 단절시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대책 본부 가동이 아니라 단단한 ‘제도적 설계’다. 첫째, 개별 부처의 기능 연속성을 행정부 전체의 정부 연속성 차원으로 격상해야 한다. 비축의 범위를 황산과 암모니아 등 핵심 공정에 필수적인 ‘산업 촉매’까지 확장하여 최소 1년 치 이상을 전략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대체 항로와 복합 운송 체계의 상시 전력화를 통해 공급망 단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둘째,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주요 에너지 공기업과 항만·항공·철도 등 핵심 물류 기관을 잇는 ‘국가 영속성 협의체’를 조성해야 한다. 요소수 사태 이후 마련된 개별적 경보 시스템을 에너지와 물류 전 분야로 확대하고, 범정부 차원의 통합 관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특히 AI와 데이터를 중심으로 글로벌 자원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위기를 사전 예측하는 ‘지능형 플랫폼’으로의 대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셋째, 에너지 소비 구조의 근본적 체질 개선이다. 가스나 석탄에 대한 직접 의존도를 낮추고, ‘전기화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여야 한다. 넷째, 우선순위 배분제의 법제화다. 장기 봉쇄로 자원이 절대 부족할 경우 필수 공공 서비스와 전략 산업에 자원을 강제 배분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실행 매뉴얼을 정비해야 한다.
불가항력의 파도가 안방까지 밀려온 뒤에 대책을 세우는 것은 이미 늦다. 현재 우리나라는 개별 기관 차원의 기능 연속성 계획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영속성 체계는 여전히 공백 상태다. 중동발 위기가 상시화되는 상황에서 ‘북극항로’는 대체 불가능한 ‘에너지 및 해운물류 생명선’이자 국가 영속성의 핵심 전략이다. 이제 에너지, 교통, 민생을 아우르는 국가 핵심 기능과 글로벌 자원 의존도를 통합 관리할 ‘국가 영속성 위원회(가칭)’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거버넌스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