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수의 과기세] 전화 탄생 150주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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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한국과학사학회 회장

벨과 그레이 1876년 2월 14일 특허 신청
특허 취득·사업 성공 벨만 발명가로 기억
당시 미국 특허제도 '선발명주의'에 입각

우리에게 밸렌타인데이로 익숙한 2월 14일은 ‘전화 탄생일’이기도 하다. 전화를 처음 발명한 사람으로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꼽힌다. 1995년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모 기업의 광고는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벨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1876년 2월 14일 벨은 전화에 대한 특허를 엘리샤 그레이보다 2시간 빨리 제출했고, 그 결과 벨은 전화의 발명자로 후대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레이는 일반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전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레이가 벨보다 먼저 떠올렸다. 그레이는 웨스턴 일렉트릭의 공동 창립자로 다중 전신기에 골몰하다가 1874년 전화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그레이는 동료 전문가들에게 전화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으나 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전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유럽에서 이미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화는 장난감에 불과해 상업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레이는 전화를 제쳐두고 다시 전신기 개발에 집중했다. 만약을 대비해 1876년 2월 14일 전화에 대한 ‘특허 보호 신청서’(patent caveat)를 제출했다.

그레이가 전문가였다면 벨은 아마추어였다. 미국 보스턴 대학의 농아학교 선생이던 벨은 일과가 끝나면 실험을 즐겼다. 그는 훗날 장인이 되는 가디너 허버드의 후원으로 다중 전신기에 관한 연구를 추진했다. 허버드는 벨이 다중 전신기를 개발하면 딸 메이블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벨은 1875년 6월 2일 전화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일련의 연구를 수행한 후 1876년 2월 14일 특허를 신청했다.

벨이 그레이보다 2시간 빨리 특허를 출원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의 서류가 몇 시에 들어갔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는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특허권을 신청하는 타이밍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에서는 서류를 먼저 접수한 사람이 아니라 발명을 먼저 한 사람에게 특허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특허제도는 오랫동안 ‘선발명주의’(first to invent rule)에 입각했으며, 2013년에야 ‘선출원주의’(first to file rule)로 변경됐다.

1876년 3월 7일 미국 특허청은 벨의 특허를 승인했다. 그로부터 3일 뒤에는 벨이 실험 중에 컵에 담긴 액체를 쏟아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조수가 옆에 있는 줄로 알고 “미스터 왓슨, 이리 와 보시오. 볼 일이 있소”(Mr. Watson, Come here! I want you.)라고 말했다. 그런데 왓슨은 전화로 연결된 다른 방에 있었고, 메시지를 들은 후 곧바로 벨의 방으로 왔다. 앞의 글귀는 ‘세계 최초의 전화 메시지’로 평가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과 언론에 의해 계속해서 회자됐다.

벨은 이후에도 전화를 개량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 진행해 1877년 1월 30일 두 번째 특허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877년 7월 9일 벨 전화회사가 설립되어 전화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전화의 상업화가 본격화된 1877년 말에 전화에 대한 공식 특허를 신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자신의 설계 내역을 벨이 훔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며, 두 진영의 공방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전화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안토니오 무치라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무치는 1856년부터 1870년까지 여러 종류의 전화기 모델을 실험한 후 1871년 특허 보호 신청을 진행했다. 보호 신청은 3년 동안 유효했기 때문에 1874년 갱신되어야 했지만, 무치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무치가 정식 특허를 내기 위해 웨스턴 유니언 전신과 협의하는 동안에 전화기 모델과 설계도를 잃어버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무치는 1879년 벨을 사기 행위로 고소했지만, 10년 뒤에 무치가 세상을 떠나면서 재판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게 흐른 2002년 미국 하원은 무치의 공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무치에게 10달러의 신청 비용만 있었더라면, 벨에게 특허권이 부여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과장된 면도 있어 보이는데, 10달러가 그리 큰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상원은 하원의 결의안을 투표에 회부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화 발명과 관련된 사람의 수는 5명을 넘어선다. 사실상 19세기 중엽에는 전화 발명 시도가 본격화하면서, 다수의 사람이 전화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전화를 발명했다기보다는 몇몇 사람들이 전화를 비슷한 시기에 발명했다는 논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른바 ‘동시 발명’ 혹은 ‘복수 발명’의 논리인 셈이다. ‘누가 전화를 최초로 발명했는가?’하는 문제에 쉽게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화로 세계 최초의 특허를 받고 그것으로 사업을 벌인 공은 여전히 벨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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