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며 익어 가는 얼굴들… 권용재 감독의 영화 ‘고당도’
찾기 힘든 실낱같은 희망 담아
웃음·불편 간격 부드럽게 조율
권용재 감독이 영화 ‘고당도’로 스크린 관객을 만나고 있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떫은 감은 처음부터 달지 않다. 서둘러 베어 물면 입안에 거친 맛만 남고, 상품 가치도 없다. 하지만 시간을 견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스로 수분을 내어주고, 단단했던 결을 풀어내며 다디단 홍시가 되거나 곶감이 된다.
영화 ‘고당도’가 바라보는 가족 역시 그런 존재다. 함께 있다는 이유로 늘 옳지도, 오래 버텼다는 이유로 곧장 달아지지도 않는다. 메가폰을 잡은 권용재 감독은 한 가족을 떫은 채로 놓아두고, 그 안에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끝내 남는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 감독은 “감은 씹고 삼켜야 하는 과일”이라며 “가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좋고 싫음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지난 10일 개봉한 ‘고당도’는 아버지의 부의금으로 조카의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짜 장례식을 치르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감독은 이 과정에서 아직 익어 가는 중인 관계의 시간을 기록한다. 사랑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책임과, 미움이라는 말로도 밀어낼 수 없는 연대가 겹겹이 쌓여 있는 한 가족을 조용히 응시한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축적된 시간과 감정의 무게, 명암을 단순화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지나치게 현실에 밀착하면 공감보다 불쾌감이 먼저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인물과 상황 사이에 의도적으로 간격을 두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설정만 놓고 보면 블랙코미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영화는 웃음의 타이밍보다 감정이 멈칫하는 순간에 더 오래 머문다. 누군가는 독박 간병에 지쳐 있고, 누군가는 실패한 삶을 숨기듯 도망쳐 왔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미래 앞에 서 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들어내는 장례식은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기보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어디까지 버텨 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권 감독은 “후반 작업을 하면서야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발견하기 힘든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주고 싶은 게 내가 영화를 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영화의 중심에는 장녀 선영이 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오랜 시간 아버지를 돌봐온 그는 가족의 균형을 붙잡고 버텨온 인물이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현실을 계산하고, 연민보다 책임을 먼저 떠안는다. 선영을 연기한 강말금은 이 인물을 비장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체념과 피로,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날 선 말들 사이에 미세하게 남은 온기를 남겨두며, 인물의 얼굴을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그 덕분에 선영의 선택은 이해를 구하는 변명이 아니라, 우리 삶 어딘가에서 이미 반복돼 온 결정처럼 다가온다. 권 감독이 “선영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저 버텨 온 사람”이라며 “그 버팀의 시간 자체를 존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족도 한 집단이잖아요. 해체될 수 있는 여러 상황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일정 부분 봉합이 되더라고요. 버티면서 살아내면 견딜 수 있다는 걸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보고 배운 것 같아요.”
‘고당도’는 단편영화 ‘조의’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권 감독은 그때보다 한 발짝 물러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웃음과 불편함 사이의 간격을 부드럽게 조율한다. 감과 제철 과일의 이미지, 고인의 ‘고(故)’와 도착한다는 의미의 ‘당도(當到)’가 겹쳐진 제목처럼, 영화는 서서히 익어 가는 시간을 견디는 가족의 얼굴을 비춘다. 덜 익어 떫고, 너무 익어 무르기 직전의 순간, ‘고당도’가 붙잡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감독은 “따뜻한 가족 이야기보다 차가운 가족 이야기를 좋아하고 아이러니한 지점에 관심이 간다”며 “가족만큼 아이러니한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놀이터에서 노부부가 함께 노는 장면 같은 걸 보면 마음에 그 모습이 깊이 맺힌다”고 했다.
첫 장편을 세상에 내놓은 그는 이제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가족 이야기다. 다만 이번에는 ‘건강하게 해체되는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여전히 회색지대에 놓인 것들이 많아요. 저는 그런 걸 조금이라도 걷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선한 영향력이라고 하잖아요. 저도 거기에 작게나마 함께하고 싶습니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