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토우치 3도’ 예술 기행: 나오시마·데시마·이누지마
■부산발 3박 4일 트리엔날레 여행기
쿠사마 야요이 ‘호박’부터 이우환까지
자연·건축·철학이 숨쉬는 미술 순례
일본 나오시마의 상징과도 같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야외에 설치돼 있다. 나오시마를 찾는 관광객이 1순위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현종 제공
세토우치(瀬戸内). 일본의 본섬인 혼슈, 시코쿠, 규슈로 둘러싸인 잔잔한 바다인 세토내해와 그 연안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그곳은, 오늘날에는 자연 현대미술이 어우러진 예술의 성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세토우치 국제예술제(세토우치 트리엔날레)이다. 가을 시즌(2025년 10월 3일~11월 9일) 막바지에 나오시마·데시마·이누지마를 다녀왔다. 국제예술제에 일부러 맞췄음에도 이 기간에만 볼 수 있는 작품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만큼 볼 게 너무 많았고, 3박 4일이라는 시간이 짧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주요 미술관만 돌아다녀도 시간이 모자랐다. 십수 년 전 첫 나오시마 여행 이후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세토우치 3도(島) 기행’을 싣는다. 통칭 ‘나오시마 예술 여행’이다.
일본 나오시마의 상징과도 같은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호박'(南瓜), 2022년. 촬영 Tadasu Yamamoto. ©YAYOI KUSAMA 공익재단법인 후쿠다케재단(福武財団) 제공
일본 나오시마 섬 미야노우라 항을 떠나는 페리 안에서 찍은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있는 풍경.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에서 나오시마 가는 길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점점 편리해진다. 2023년 10월 부산~마쓰야마 항공 노선이 생긴 게 가장 큰 변화였다. 덕분에 나오시마로 들어가는 여러 방법 중에 부산~마쓰야마~다카마쓰를 거쳐 쿠사마 야요이의 야외 설치 작품 ‘빨간 호박’이 있는 미야노우라로 입항했다. 그전에는 ‘이에(家·집) 프로젝트’(Art House Project)로 유명한 혼무라 지구를 이용했다.
그땐 쿠사마 야요이의 또 다른 야외 설치 작품인 ‘호박’(南瓜, 일명 ‘노란 호박’)부터 만났다. 무엇을 먼저 만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사람 심리가 처음 만나는 것에 들이는 시간이나 애정이 남다르다 보니 이번 여행은 ‘빨간 호박’이 있는 부두에서 보낸 시간이 무척 길었다. 2021년 태풍 피해 이후 복원, 설치한 ‘호박’은 여전히 인기가 높아 사진이라도 한 번 찍으려면 긴 줄을 서야 했다.
■공간 자체가 예술, 데시마 미술관
세토우치 여행은 기본적으로 크고 작은 미술관 순례이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로 명명된 프로젝트에는 나오시마, 데시마, 이누지마 3개의 섬에 설치된 30개 이상의 시설과 20개 이상의 예술 작품이 포함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데시마(豊島) 섬에서 만난 ‘데시마 미술관’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세지마 가즈요와 함께 ‘사나’(SANAA)의 공동 설립자인 니시자와 류에(西沢立衛)가 설계한 작품이다. 건축물은 기둥이 없는 얇은 콘크리트 셸구조로, 하늘로 타원형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인 일체형 미술관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느낌이 달라지는 곳이다.
미술관에는 단 하나의 작품이 존재한다. 나이토 레이(內藤礼)의 ‘매트릭스’(Matrix). 살짝 기울어진 경사로 바닥을 타고 제멋대로 흐르는 물방울이 그것이다. 흰색 콘크리트 바닥에 수많은 핀홀(구멍)이 있어서 그곳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었고, 그것이 바닥을 따라 제멋대로 천천히 흐르다가 뭉치고 흩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게다가 하늘로 뚫린 구멍을 통해 빛과 바람, 새소리, 파도 소리, 빗소리가 그대로 흘러 들어와서 그 시간과 공간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면 되는, 그런 곳이었다.
일본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李禹煥美術館) 전경. 촬영 Tadasu Yamamoto. 공익재단법인 후쿠다케재단(福武財団) 제공
■‘이우환 공간’의 원조, 나오시마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곳은 올해 5월 나오시마(直島) 섬에 새롭게 문을 연 ‘나오시마 신미술관’(별도 기사 참조)과 한국에선 유일하게 부산에만 있는 ‘이우환 공간’ 원조 격인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이우환 공간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 세 곳만 운영 중이다.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2010년 개관), 부산 이우환 공간(2015년 개관), 그리고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의 ‘이우환 아를’(Lee Ufan Arles, 2022년 개관)이다. 부산과는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더도 덜도 아닌, 꼭 필요한 것만 갖춘 이우환 미술관이다 싶었다. 부산 이우환 공간이 이우환 선생 손길이 제법 많이 닿은 거라면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 색깔이 많이 묻어난다. 미술관 전체가 ‘관계항’(Relatum)이라는 작가의 철학을 공간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외부 공간과 내부 전시실에 걸쳐 작가의 대표작들이 상설 전시 중이다.
‘관계항-돌의 그림자’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부산에는 없는 작품이다. 실제 ‘돌이 만드는 물리적인 그림자’와 ‘작가가 그린 그림자’가 겹쳐져 있다. ‘실재’와 ‘가상’, 그리고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떠올렸다. 외부 공간의 세토내해 언덕과 바다 사이에 설치된 ‘무한문’도 인상적이었다. 스테인리스 스틸 판 위 거대한 아치 아래를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인공적인 건축물(아치)이 자연(바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일본 이누지마 세이렌쇼 미술관(犬島精錬所美術館) 전경. 촬영 Daici Ano. 공익재단법인 후쿠다케재단(福武財団) 제공
■미시마 유키오 오마주 ‘논쟁’
또 다른 섬 이누지마(犬島) 섬에는 ‘세이렌쇼(精鍊所) 미술관’이 있다. 한때 잘나가던 구리 제련소가 불과 10년 만에 폐업된 뒤 산업 유산이 된 그곳을 2008년 산부이치 히로시(三分一博志) 건축가가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이번 세이렌쇼 미술관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공간이나 작품이 아니라 ‘논쟁’이다. 미술관 내부에 설치된 야나기 유키노리(柳幸典)의 설치 작품을 둘러싼 우리 일행 간 사소한 논쟁이 있었다. 특히 미술관 중앙갤러리에 설치된 ‘영웅 드라이 셀’(Hero Dry Cell)은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헌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둘러싼 서로의 해석이 충돌한 것이다.
작품은 미시마가 실제 살았던 도쿄 저택의 건축 부재(창문, 문, 사진 등)를 옮겨와 활용했다. 일행 중 A는 빛과 거울의 반사를 통해, 미시마가 강조했던 ‘영원한 미’와 ‘일본의 전통 정신’이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파괴되었는지 관람객 스스로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라고 해석한 반면, B는 해석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사실 작품만 봐서는 야나기가 미시마 사상을 찬성하거나 비판했다고 잘라 말하긴 어려웠다. 그동안 야나기가 보여온 전시 행보로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없진 않지만, 처음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한테 그것까지 요구하는 건 무리하는 의견이 상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비판적 미시마 읽기를 통해 야나기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고 보면 나 홀로 여행이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의 힘, ‘국수월재수’
이번 여행에서 집단지성의 힘을 느낀 순간은 한 번 더 있다. 세 섬을 돌아보고 귀국하던 날, 에 들렀을 때이다. 다카마쓰는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섬들로 가는 주요 관문 항구이며, 많은 관광객이 다카마쓰를 거점으로 삼는다.
정원이 아름다운 특별명승지인 리쓰린공원 안에서도 연못을 조망하며 말차를 마시는 곳으로 유명한 ‘기쿠게쓰테이’(掬月亭)에서 즐겁게 지내던 중 도코노마(장식용 상징 공간)에 걸린 족자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그곳엔 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일행 중 아무도 읽지를 못했다.
서예에 조예가 깊은 A, 고문에 박식한 B 등 몇 명이 달라붙었고, 족자 사진을 찍어서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인 챗GPT에 물었다. 그런데 그 AI는 아주 그럴듯한 뜻으로 해석했고, 정답을 몰랐던 우리는 AI의 실력에 연신 탄복했다.
문제는 그것이 정답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우여곡절 끝에 관리인 도움을 받아서 족자 속 다섯 글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국수월재수’(掬水月在手). “물을 한 움큼 떠내니, 달이 내 손안에 있네.” 움켜쥘 국(掬) 혹은 ‘(두 손으로) 물을 떠내다’라는 단어가 핵심이었다. 이후엔 각자가 검색 실력을 발휘해 글의 출처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AI가 알려준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너무나 그럴싸한 대답에 다들 감쪽같이 속을 뻔했다. 모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AI의 맹신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일본 나오시마 지추미술관(地中美術館)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촬영 FUJITSUKA Mitsumasa. 공익재단법인 후쿠다케재단(福武財団) 제공
일본 나오시마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Benesse House Museum). 공익재단법인 후쿠다케재단(福武財団) 제공
일본 나오시마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Benesse House Museum). 공익재단법인 후쿠다케재단(福武財団) 제공
■나오시마를 떠나며
이 외에도 나오시마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지추미술관(地中美術館)만 하더라도 세토우치의 아름다운 경관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대부분의 건물을 지하에 매설했는데 처음엔 그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미술관에는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월터 데 마리아의 작품이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에 영구 설치돼 있다. 지하이지만 자연광이 쏟아져 하루 종일 멍때리고 앉아서 시시각각 변하는 공간과 작품을 보고만 있어도 좋을 곳이다.
여유가 있다면 섬과 섬 사이를 오가며 배 시간에 맞춰 종종걸음을 할 게 아니라 ‘베네세 하우세’ 같은 곳에서 하루쯤 느긋하게 머물며 ‘호박’도 보고, 맛있는 지역 먹거리도 즐기면서, 이번엔 미처 보지 못했던 ‘이에 프로젝트’를 다시금 찬찬히 돌아봐도 좋을 것이다.
이번 글에선 나오시마·데시마·이누지마를 중심으로 언급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메기지마, 쇼도시마, 오기지마, 오시마, 야와시마, 이부키지마 등에도 가 보면 좋겠다. 세토우치 국제예술제는 총 17개 지역에서 개최 중이다. 예술제는 3년 뒤에나 열리지만, 나오시마와 데시마, 이누지마는 언제 가도 좋은 곳으로 항상 열려 있다.
나오시마·데시마·이누지마(일본)=김은영 기자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