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 칼럼] 반갑지 않은 설날 인사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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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비상계엄 사태 이후 맞은 설날 연휴
명절임에도 온 나라 무거운 분위기

이 와중에 윤 대통령은 명절 메시지
자중해야 할 판에 정치적 의도 표현

거리에 걸린 정치인 현수막도 짜증
진정성 없는 인사 정치 혐오만 가중

을사년의 공식적인 설날 연휴가 끝났다. 이번 주말까지 이어서 연휴를 즐기는 국민도 있겠지만 이들도 연휴와 1월의 끝자락에서 새 2월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다. 이즈음은 설날 연휴와 입춘이 연달아 여느 때보다 한 해의 새로운 다짐을 하기에 좋은 시기다. 그러나 올해는 아쉽게도 12·3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로 이마저 심드렁한 느낌이다. 유례없이 어수선하고 부산하게 시작된 새해 분위기가 명절 기분도 착 가라앉게 했다.

온 나라가 들뜨고 왁자한 기운에 휩싸여야 할 설 연휴였지만 비상계엄의 그림자는 명절 가족들의 밥상에도 칙칙한 분위기로 찾아왔다. 예전에도 살얼음을 밟는 듯하던 가족 간 정치 이야기는 이번 설엔 특히 금물 중의 금물이었다. 모처럼 한 밥상에서 숟가락 달그락달그락하며 밥 한 끼 하는 자리가 부지불식간에 설도(舌刀)의 날을 세우는 언쟁의 자리로 돌변할 수 있는 탓이다.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사실상 정신적인 내전 상태로 들어섰다는 우리나라 정치가 가족 간 침묵을 강요한 셈이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국민들의 입은 열릴 줄 몰랐으나 정작 나라 꼴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이 와중에도 설날 덕담이랍시고 또 국민의 속을 헤집는 말을 내놨다. 눈 밖에 난 사람의 말은 아무리 듣기 좋은 노랫소리라도 꼭 곡소리처럼 들린다는 속담처럼 국민들에겐 전혀 생뚱맞게 들렸을 것이다.

지난 24일 설 연휴를 앞두고 내란죄 우두머리 혐의로 수감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은 “설날이 다가오니 국민 여러분 생각이 많이 난다”라며 “여러분 곁을 지키며 도와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고 죄송하다”라고 옥중 메시지로 설 인사를 남겼다. 체포영장 집행 과정에서 온갖 지질한 행태를 벌이다가 공수처에 가서는 또 조사에 불응하며 극우 여론전을 펼쳤던 윤 대통령의 명절 인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여권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이 기대고 있는 강성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인 메시지라는 해석을 내놓은 지경이니 그 진정성은 애초부터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설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라는 가요를 합창하며 “언제나 국민 곁에 함께하는 따뜻한 정부가 되겠다”라는 메시지를 동영상으로 올렸다. 올해는 탄핵까지 당한 처지여서 가식적이고 오글거리는 명절 인사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뜸 “국민 여러분 생각이 많이 난다”라는 의도가 뻔한 메시지를 접하고 나니 언뜻 목덜미에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국민은 지금 수감 중인 대통령으로부터 설날 인사를 받고 말고 할 그런 기분이 아니다. 대통령이 관련 법에 따라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만 보고 싶을 뿐이다.

설날 인사라고 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인사는 또 있다. 목 좋은 사거리나 행인들의 눈길을 끌기에 좋은 곳이라면 어김없이 걸려있는 정치인들의 현수막. 제멋대로 말하고 자신의 말만 강요하는 정치인들의 이런 인사를 국민은 받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괴롭게 여긴다. 주권자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데도 정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흉물의 현수막을 인사랍시고 강제로 들이민다. 상대편에 대한 비난까지 곁들여 보고 싶지 않다는 국민을 따라다니며 집적댄다. 스토킹 행위와 다름없다. 더구나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정치적 혼란이 민생마저 갉아먹고 있는 지금, 여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의 유체이탈 화법의 인사는 오히려 국민의 속만 긁어 놓는다.

윤 대통령부터 많은 여야 정치인이 거의 예외 없이 국민들에게 많이 받으라는 ‘설날 복 또는 행복’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치 혐오를 조금이라도 유발하거나 암시한다는 혐의를 피하려 해도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 같은 물음은 정치 혐오나 무관심의 범주를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많은 국민은 최근 수년간 정치인들의 행위로부터 복이나 행복 비슷한 것조차 느낀 적이 거의 없다고 여길 것이니 말이다. 이도 저도 다 싫다는 국민이 한둘이 아님을 감안하면 정치인들이 언급하는 복과 행복은 국민에겐 오히려 정치 혐오와 무관심의 숨겨진 의미로 이해되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내년에도, 또 그다음 해 설날에도 보란 듯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면 진정성 없이 그냥 내던지는 겉치레의 인사는 오히려 정치 혐오나 무관심만 증폭시킬 뿐이다. 설령 처음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선 이런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인이라면 곰곰이 생각해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도 저도 모두 내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조용한 침묵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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