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드라마 '정년이'가 깨운 한국인의 국악 DNA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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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세계인에게 핫한 음악으로 승화

드라마 스토리, 공감력 키워
피리·플루트·DJ… EDM으로
우리 소리 깊이와 맛, 역사성 부각
세상에 드러내는 자신감 돋보여

공연장 매진, 국악 방송 추가 편성
일반인, 흥부전 판소리 레슨 요청
부산국악원, 대중화·세계화 앞장서
20대 국악인 밴드 잇달아 결성돼

드라마 ‘정년이’에서 배우 문소리가 심청가 ‘추월만정’을 부르고 있다(사진 왼쪽). 부산 광안리에서 개최된 ‘세계 핼러윈 퍼레이드 페스티벌’에서 ‘소리연구회 소리 숲’이 농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태평소 선율에 피리를 불면서 EDM 월드뮤직으로 선보였다. 부산일보DB 드라마 ‘정년이’에서 배우 문소리가 심청가 ‘추월만정’을 부르고 있다(사진 왼쪽). 부산 광안리에서 개최된 ‘세계 핼러윈 퍼레이드 페스티벌’에서 ‘소리연구회 소리 숲’이 농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태평소 선율에 피리를 불면서 EDM 월드뮤직으로 선보였다. 부산일보DB

판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여성국극을 조명한 드라마 ‘정년이’가 최근 시청률 16.5%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시골에 숨은 명창 출신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에도 끝내 국극 배우가 된 정년이의 처연한 판소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950년대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판소리 등 국악에도 바람이 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심청이가 황후가 된 후 아버지를 그리며 부르는 ‘추월만정’을 배우 문소리와 김태리의 목소리로 듣고는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정년이’의 소리가 한국인에게 내재된 흥과 끼의 DNA를 깨우고, 우리 소리의 깊이와 맛을 알게 한 셈이다.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청가를 흥얼거리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가야금 명인 김남순 부산대 명예교수는 “웹툰과 드라마가 일반인이 잘 모르고 있던 국악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제대로 끄집어냈다”면서 “이제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진 한국 전통음악을 세상에 드러내는 자신감과 공감대, 안목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 해외에서 주목받는 국악

2020년, 별주부와 토끼의 추격전을 담은 판소리 수궁가(토끼전)를 재해석해 전통적인 판소리에 현대적인 팝 스타일을 조화시켰던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드라마 ‘정년이’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K판소리 한류를 만드는 데 폭발적인 기여를 했다. OTT 디즈니플러스 글로벌 TV쇼 부문 6위를 기록하는 등 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미국 포브스가 ‘19세기 판소리의 연극 버전’이라고 국극을 소개하면서 K드라마 정년이 특집을 다루기도 했다. 노년층의 한물간 문화 유물로 치부됐던 판소리가 세계인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음악이 된 셈이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이런 여세를 몰아 내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그린 무용극 ‘조선통신사-유마도를 그리다’를 일본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정년이’와 같이 전통무용과 국악 등이 완벽한 무대를 이룰 예정이다. 부산국악원 판소리 단원 김미진 씨는 “해외에서 가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데 객석에서 숨소리 하나 안 들릴 정도로 집중한다”면서 “최근 국악인들은 판소리와 국악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꿈을 꾸고 있다”라고 밝혔다.

■ 대중화 신호탄 쏘나

대부분 국악인은 ‘정년이’ 드라마에서 스토리텔링과 음악에 대한 서사가 국악 대중화에 굉장한 기폭제가 됐다고 판단한다. 국악은 18세기 서양 오케스트라 음악보다도 더 오래됐지만, 제대로 된 해설과 스토리텔링이 없는 것이 한계였다. 한번 듣고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2회 분량의 ‘정년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소리를 완성하며 겪는 어려움과 극복의 서사에 공감하면서, 한국인에 내재된 국악 DNA가 깨어나게 된 셈이다.

최근 국악 공연장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1인창극 공연을 하는 소리꾼 이향송 씨는 지난 17일 해운대 문화회관에서 초연된 1인 창극 ‘사자탈을 쓴 장산범’ 공연에서 “너무나 많은 분이 오셔서 즐겁게 보시고, 또 많이 울고 가시기도 하셨다”면서 “관객 반응이 이전보다 훨씬 뜨거워졌다”라고 말했다. 부산MBC 라디오 ‘가정 음악실’ 국악 코너 ‘모던 풍류’도 한 달에 1회 편성된 프로그램을 이제는 매주 진행하고 있다. 부산MBC 안희성 국장은 “최근 국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몰랐던 매력을 알아간다’ ‘우리 소리에 귀가 트였다’ 등 청취자 호응이 훨씬 높아졌다”라고 전했다.

판소리 창극을 현대화하는 '데라클 엔터테이먼트'와 손잡고 전통 민담과 설화를 재해석하고 있는 소리꾼 이향송 씨는 최근 연말 파티에 춘향전 방자전 부분의 판소리를 하고 싶다면서 레슨이 들어오는 등 전례없는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귀띔한다. 일반인들이 우리 판소리가 이렇게 매력적이었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국립부산국악원은 6·25전쟁 와중에 부산으로 피난 온 국악 명인들이 부산의 한 여관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근현대사 국악극 ‘대청여관’을 2025년도에 올릴 예정이다.

■ 젊은이 속으로 들어간 국악

젊은 국악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우리의 전통 유산 국악을 힙(hip·유행에 밝다)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부산에서도 전통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창작곡과 서양음악과의 콜라보를 통해 모험과 도전에 나서고 있는 국악 공연이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소리연구회 소리 숲’. 지난달 30일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부산 수영구 수변공원 옆 밀락더마켓에서 ‘2024원데이뮤직페스타BUSANWAVE’ 무대를 열었다. 전문 DJ에 의한 신스팝(synthpop)과 태평소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EDM으로 진화한다. EDM에 맞춰 머리를 흔들다가, 태평소와 피리 소리에 온몸을 휘청이기도 한다. 일몰의 광안리 바다를 보면서 피리와 플루트의 협연, 태평소의 농악을 현대화한 재즈 버스킹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무대를 엮어냈다.

소리연구회 소리 숲 김지윤 대표는 “정통성에 기반을 둔 국악의 재해석을 통해 서양음악과 어우러지면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고 밝혔다. 다음 달 13일에는 해운대 문화회관에서 ‘민요, 세계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초연 창작곡 7곡 등 모두 10곡을 국악기와 서양악기, 합창으로 풀어낸다. 국립부산국악원 판소리꾼 김미진 씨는 이날 과테말라 민요를 그 나라 언어인 마야어 판소리로 풀어낸다.

■ 20~30대 젊은 국악인 활동 두드러져

김미진 씨는 "최근 지역 출신 젊은 국악인이 대학 졸업 전후에 밴드를 결성해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서양악기나 무용과 콜라버하는 공연 기획이 활성화됐다"고 평가했다.부산과 대구 등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청년국악그룹 ‘신민속악회 바디’. 신민속악회 바디는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전승받은 소리에 자신의 음악적 색을 입혀 다듬어놓은 소리를 의미하는 ‘바디’란 이름처럼, 전통음악을 새롭게 해석해 한국적인 특색과 창의성을 담은 음악을 창작한다. 바디 단원이자 아쟁 연주자인 정선겸 씨는 “끼와 전통국악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젊은 국악인들의 활동이 다채로워지고 있다”면서 “최근 K컬처에 대한 자부심, 자신감까지 합쳐지는 흐름”이라고 말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판소리꾼 및 국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국악밴드 활동도 두드러진다. 국악그룹 ‘HAVE (헤이브)’ ‘이쁠’ 등도 모두 20대가 주역이다. 헤이브는 피아노와 첼로의 선율에 남도 굵은 성음을 얹은 '모던 판소리' 그룹이다. 이들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만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20대 소리꾼 이향송 씨는 부산 문학가의 수필집 〈오늘도 소리도〉를 판소리와 국악기를 섞은 창작곡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판소리 작품을 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국악그룹 '이쁠'은 지난 8월 이탈리아 톨파와 페라라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버스커 축제(Ferrara Busker's Festival)에 초청됐다. 이쁠 단원 안이서 씨는 "그들에게 우리 음악의 독특한 음계와 선법 등의 소리를 들려주며 자연스레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로 부상했다"면서 "전 세계인과 국악으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부산대 김남순 명예교수는 “부산은 6·25전쟁으로 임시정부 시절 국립국악원이 처음으로 설립된 곳으로 국악의 전통을 갖고 있다”면서 “국악에 대한 본질을 놓치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국악인이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서 발전한다면, 충분히 주류 음악으로 성장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의 예술성을 부각하는 많은 소재를 현대 작가들이 계속해서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희망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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