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
영화평론가
허진호 감독 영화 '보통의 가족'
헤르만 코흐 소설 '더 디너' 원작
자녀의 범죄 사실 은폐하기 위해
신념까지 저버리는 부모들 묘사
금전만능주의 한국 병폐 꼬집어
‘보통의 가족’은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이미 전 세계에서 4번이나 영화화된 작품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서사와 연출에도 영화가 끝난 뒤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 영화 속 일이 내게도 벌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을 한순간에 내던질 수 있을까? 영화는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되묻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외출’, ‘봄날은 간다’ 등으로 한국형 멜로 영화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허진호 감독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장르로 돌아왔다. 그의 역사영화 ‘천문: 하늘에 묻다’나 ‘덕혜옹주’와도 또 다른 결이다. 허진호 감독은 전작들에서 미장센을 통해 영화적 감성을 보여주었다면 ‘보통의 가족’에서는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다. 앞선 영화들과 달리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물들의 감정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점에선 역시나 허진호의 영화답다.
‘보통의 가족’은 누군가의 보복운전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어린 딸은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를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재완, 재규 형제는 이 충격적인 사고와 깊숙이 연결되면서 이후 자신들의 신념이 충돌하는 것을 확인한다. 재완은 돈만 많이 준다면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이며, 동생 재규는 윤리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아과 의사이다. 형제는 이 사건의 변호인과 주치의가 되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또한 형제는 직업윤리에 맞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사건을 대한다.
전처와 사별 후 지수와 결혼해 늦둥이를 낳아 키우는 재완과 치매에 걸린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는 연경을 아내로 둔 재규는 사소한 갈등은 있지만 행복해 보인다. 두 가족은 주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등 우애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은 금세 밝혀진다. 원작의 제목이 ‘더 디너’이니만큼 영화에서도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밥을 먹는 횟수가 쌓일수록 가족의 민낯도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 식사 자리에서는 보통의 가족과 다름없이 화목해 보이지만, 이내 이들이 만난 이유가 치매에 걸린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기 위해서였음이 밝혀진다. 불편한 침묵과 위선의 얼굴, 가식의 말들이 오고 가지만 그들은 세련된 매너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다음 저녁 식사는 재완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았지만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는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가장해 은밀히 만난 이유는 자식들이 일으킨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부모는 자식의 문제 앞에서 신념이나 윤리의식을 내던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밥을 먹기 위해 만났지만 신경전을 벌이느라 밥 한술 뜨지 못한다. 가족 내에서 겉돌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지수만 밥을 먹을 뿐이다. 밥을 먹는 듯 보이지만 재완과 재규, 연경은 그럴듯한 말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주장하기 바쁘다.
그러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 자신들의 문제가 되었을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보였던 연경은 아들의 범죄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감정만 남고, 위선을 떨쳐낸 모습에는 패악만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폭발한다. ‘보통의 가족’은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연기하기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나 대화와 표정만으로도 역동적인 풍경을 만든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마주했을 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신념을 놓아버릴 수 있는지 깊이 파고든다. 우리는 과연 겉과 속이 다른 이 형제를 마냥 비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