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하듯 쉬어 가세요”…광리단길 24시간 밝히는 ‘위로 책방’ [별별부산] ⑦
[밤산책방]
관광객들 몰리는 광안리 카페 거리
위로와 치유 콘셉트 무인 운영 서점
개성 넘치는 독립 출판물 위주 진열
지하·소규모지만 입소문 타고 인기
“의미 있는 시간 줄 수 있어 뜻깊다”
주인장 취지 공감한 방명록 줄이어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광안리해수욕장 일대는 언제나 왁자지껄하다. 도시철도 금련산역 인근에 있는 카페 거리인 일명 ‘광리단길’은 부산 사람보다 관광객 사이에서 더 유명하다. SNS에서 입소문을 탄 식당과 카페는 늘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늦은 밤까지도 젊음의 활기가 넘치는 이 거리에는 혼자 조용히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독립 서점도 있다. ‘밤산책방’은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만든 24시간 무인 서점이다.
독특하게 꾸민 입구 덕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밤산책방은 “낮, 밤 언제든 시간 제약 없이 쉬어 가는 위로 서점”을 표방한다.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함께 공감하고 함께 행복해졌으면 해서, 서툴지만 열심인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어서 위로가 되길 바라는 책을 판다”는 안내 문구가 방문객을 반긴다. 녹색 바탕에 하얀색 글자가 적힌 포스터가 학창 시절 칠판을 연상시킨다. 따뜻한 백열등 아래 놓인 소박한 화분들조차 제법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점 주인이 방문객들에게 쓴 편지가 보인다. 자신처럼 방황하고 좌절하는 이들이 일상을 환기하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이쯤 되니 주인의 사연이 알고 싶어진다. 궁금증을 품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힐링을 위한 공간답다. 흰색 벽면을 스크린 삼아 반복 재생되는 잔잔한 파도 영상과 소리는 늦은 밤 광안리 해변을 찾은 듯한 안도감을 준다. 은은한 조명 아래 곳곳에 배치된 원목 가구가 감성을 자극한다.
빈티지 인테리어의 정점은 책이다. 표지가 잘 보이도록 세워진 채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책들이 잠들어 있던 독서 욕구를 건드린다. 독립 서점답게 제목들이 톡톡 튄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니 마음만 있냐?>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등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주인이 직접 책을 읽고 쓴 소개글 덕에 책의 성격과 내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 상주하고 있는 직원이 없으니 한결 편하고 여유롭게 책을 구경하고 내용을 일부 읽어볼 수도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은 무인 계산대를 통해 값을 지불하고 가져가면 된다. 짐이 많은 여행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택배 서비스도 마련했다. 책방 이름처럼 밤 산책을 나왔다 발에 상처가 난 손님을 위한 일회용 밴드까지 구비돼 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의 상처까지 보듬겠다는 듯이.
이런 배려심 덕일까. 지하에 있는 데다 운영을 시작한 지 2년을 막 넘긴 소규모 서점이지만 방문객이 꽤 많다. 기자가 찾았던 평일 오후에도 7~8명의 손님들이 서점에 있었다. 블로그와 SNS에도 방문기가 넘쳐 난다. 그런데 정작 사장은 고민이 늘었다. 책방이 당초 운영 취지와는 다르게 알려지고 있어서다.
밤산책방은 원래 김소라(35) 대표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김 대표는 오늘날 청년 세대가 흔히 겪는 좌절을 맛봤다. 스무 살에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정규직 전환만 바라보며 10년을 바쳤다. 그러나 회사는 기대를 저버렸고, 미래도 막막해졌다. 고민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부산의 일자리 부족은 각오한 것보다 심각했다. 1년을 방황하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했는데, 이때 직장 내 괴롭힘을 심하게 당했다. 어느 날 퇴근 길에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고, 공황 장애까지 얻었다. 집에서도 부모의 잔소리 때문에 편히 쉴 수 없었다.
김 대표에겐 혼자서 마음 놓고 쉴 공간이 절실했다.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마련한 곳이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월세 30만 원짜리 지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김 대표는 책도 보고 휴식을 취하며 아픈 마음을 서서히 치유했다. 여유를 되찾으니 자신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끔찍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 공간을 공유하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울 수도 있고, 밤에 산책하듯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자신에게 위로가 됐던 책이 함께하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직장일과 병행하면서 지하 공간 일부를 책방으로 꾸미고 개방한 것이 24시간 무인 서점 밤산책방의 시작이었다.
김 대표의 진심은 통했다. 방문객도 매출도 조금씩 늘었다. 어느 날은 “먹고 살기 지쳐서 도망치듯이 부산에 왔다가 우연히 (이곳을)발견했는데, 마음 놓고 울고 간다”는 내용의 편지를 누군가 남기고 갔다. 눈물이 핑 돈 김 대표는 열정적으로 이곳을 단장하고 확장해 지금의 책방을 만들었다.
고비도 많았다. 무인으로 운영하는 점을 악용하는 이기적인 진상 고객이나 절도범도 문제였지만, 장마철 빗물에 침수된 책방에서 잠도 못 자고 물을 퍼낼 때가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였다. 처음엔 책방 운영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는 김 대표의 눈물 섞인 토로를 들은 다음 날 조용히 배수 펌프를 가져다줬다.
올해는 책방이 잘못 알려지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김 대표를 괴롭히고 있다. 일부 무성의한 블로거들이 이곳을 실내 데이트 공간이나 카페로 소개하고, 잘못된 정보로 인한 불만이 김 대표에게 향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 데이트 명소처럼 변하는 것도, 끊이지 않는 민폐 손님들도 고민이다.
‘책방이 나를 괴롭게 만들면 언제든 폐점할 것’이라는 김 대표의 각오가 실천으로 옮겨지는 걸 막은 건 결국 사람이었다. 책방 한쪽에는 손님들이 직접 수기로 남긴 방명록이 있다. 여기 적힌 따뜻한 문구들이 밤산책방의 폐점을 막았다.
김 대표는 “손님들로부터 격려의 편지와 SNS 메시지를 정말 많이 받는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뜻깊다”면서 “저도 책방 덕분에 공황 장애가 완전히 나았고, 사회 생활 때문에 깎여 나갔던 자존감도 회복했다”고 밝혔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마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전국에 독서 열풍이 몰아치고 있기도 하다. 밤산책방에서 이 건강한 열풍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면 더욱 좋으리라.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