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000만 원 예산이면 어르신이 즐겁다 [정달식의 일필일침]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농어촌 마을 가게 없는 곳 수두룩
생필품 사려면 큰 동네로 나가야
어르신들 차 타는 것도 부담스러워
현실적 대안은 이동식 만물 트럭 운영
농협 하나로마트 등과 연계도 가능
판매뿐 아니라 각종 서비스 펼칠 수도

“뭘 사고 싶어도, 요즘은 시장 보기도 힘들다. 차 타는 것도 겁나고 동네 이웃 차가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얻어 타고 가서 물건을 사 오곤 하는데…. ” 올 추석 때 시골 고향에 갔을 때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께서 하신 얘기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일전에 온갖 것을 싣고 동네마다 다니며 물건을 파는 트럭을 TV에서 봤는데, 우리 마을에도 그런 차가 다니면 좋겠다”라며 말을 맺으셨다.

이제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70~80대 이상의 고령자가 주를 이루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이와 함께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가게조차 사라진 마을이 늘고 있다. 이런 곳을 흔히 ‘식품 사막(food desert)’이라고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소매점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 무려 73.5%에 달한다. 이는 농어촌 마을 대략 네 곳 중 세 곳은 내부에 구멍가게 하나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필품을 사려면 꼼짝없이 차를 타고 대형 마트가 있는 큰 동네나 면 소재지로 나가야 할 판이다. 어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배달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는 도시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일 뿐이다. 농어촌 어르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편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서비스다.

어머니가 얘기한 트럭은 가게가 없는 마을을 순회하는 이동식 마트 개념의 만물 트럭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농어촌 지역에는 이런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 지방자치단체는 아직 만물 트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년 인구 유입을 위한 정책들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지역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정책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군 단위 기초지자체에서 지역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이동식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군 단위로 보자면 만물 트럭 1~2대 정도면 충분하다. 3.5톤가량의 냉동·냉장 기능을 갖춘 트럭이면 더 좋다. 신선식품은 물론이고 온갖 일상 잡화를 싣고 1주일 혹은 10일 간격으로 마을을 순회하면 된다. 문제는 누가 만물 트럭을 몰고 물건을 판매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지자체 사회복지팀을 활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본 사람을 공모해 월급제로 운영할 수도 있다. 월급제로 하면서 수익 일부를 판매자가 가져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차량 구입비와 설치비 등을 제외하고 지자체가 월 10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확보하면, 지역 어르신들의 삶이 한결 윤택하고 즐거울 수 있단 얘기다. 만물 트럭은 판매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때론 형광등 교체 등의 간단한 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트럭은 마을 단위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다른 동네로 가면 된다. 만물 트럭에 사회복지사가 동행한다면, 단순히 생필품을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마을 어르신의 건강이나 안부를 확인하는 현장형 사회복지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만물 트럭은 시골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부산 기장군이나 강서구처럼 도농복합지역에도 요긴하다. 지역 저소득·홀몸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많은 곳이라면 더 좋다.

예산이 부담돼 지자체가 선뜻 나서기 어렵다면 지역 농협과 손잡고 할 수도 있다. 물품 공급 체계와 탑차 등을 갖추고 있어 연계가 가능하다. 일부 지역에선 농협이나 지역협의체가 이동식 트럭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웃 일본은 식품 사막을 겪는 이들을 위해 일찍부터 이동 판매 차량을 운영하고 있는데, 2023년 기준 1200대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농림축산식품부가 소위 이동식 만물 트럭 형태의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 시범 운영을 몇몇 지자체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자체 차원에서 만물 트럭을 직접 운영하는 곳은 없다.

지방소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이제 시골 마을의 생활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다. 손님이 줄어들면서 가게가 문을 닫고, 이에 인구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도, 지역 농협도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있어선 안 된다. 만물 트럭은 단순한 생필품 제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어르신들이 다시 활기를 찾고,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늘도 농어촌의 어르신들은 2022년 tvN에서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 속 만물 트럭의 만물상(이병헌 분)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