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대일 외교, 현실을 직시하자
논설위원
우리 정부 ‘양보 외교’에도
일본 성의 있는 조처는커녕
되레 우경화의 길 치달아
이번 주 日 차기 총리 결정
누가 되든 한일 관계 험로
대일 정책기조 전면 전환을
윤석열 정부 대일 정책의 요체는 ‘양보 외교’다. 한일 양국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일본이 요구하기 전에 알아서 배려해 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윤 정부 전반기 동안 어떤 결실을 거두었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대부분의 정책이 국민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논란과 갈등을 불렀다. 27일이면 일본의 새 총리를 뽑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가 실시된다. 이와 맞물려 우리 정부의 대외 정책도 후반기에 접어든다. 대일 외교의 손익을 따져보고 이후의 길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2년 4개월 동안 정상회담을 열두 차례나 개최했다.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우리가 일방적으로 양보해서 얻은 결과다. 그러나 정부가 성과로 내세우는 ‘긴밀한’ 한일 관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2023년 3월 6일 윤 대통령은 일본 전범 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의 돈으로 만든 기금으로 배상금을 대납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본의 요구가 없는데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조처였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향후 한국이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일본 기업의 우려까지 덜어주는 배려를 실천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 문제. 주변국이 모두 반발했으나 우리 정부는 침묵했다. 아니 오염수 방출 전부터 일본을 감싸는 행보를 다방면에서 이어갔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을 만나 수산물 수입 재개 요청을 받고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해 나가겠다’고 언급한 내용이 일본 언론 보도로 공개됐고, 여당인 국민의힘 역시 자비를 들여 오염수 안전성을 홍보하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의 양보 외교 사례는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찬성이다. 일본은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반영한 전시물을 변방의 향토박물관으로 돌리고 ‘강제’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한일 정부가 ‘강제노동’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사전 합의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와 충격을 안겼다. 일본은 축제를 벌였고 우리는 국론분열에 빠졌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면 일본도 화답할 것이다. 윤 정부의 대일 정책 기조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우리 쪽의 일방적인 퍼주기에도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호응이나 실질적 상응 조처는 없었다. 조선인 수천 명이 숨진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만 해도 그렇다. 일본 정부가 그렇게 발뺌하던 조선인 명부의 일부가 얼마 전 공개됐는데 그동안의 거짓말에 대해 사과 한마디가 없다. 다른 사안은 말해 무엇 할까.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절박한 기대가 사실상 ‘물거품’으로 끝났듯 앞으로의 바람 역시 허망한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일본 정부는 최근 들어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지우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며 오히려 우경화의 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양보 외교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이제 재고해야 할 때가 됐다.
대통령실의 한 핵심 인사는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로 누구를 위한 해명인지 모를 해명을 한 바 있다. 외교안보 책임자의 표현이라기엔 참으로 기이한 측면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배려나 양보가 중요한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는 인간 개인의 도덕적 자질이나 종교적 수행에 어울리는 덕목일 뿐, 철저히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냉혹한 국제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절대 아니다. 특히 과거사가 얽힌 문제에서 가해국이 아닌 피해국이 먼저 머리를 숙이는 게 가당키나 한가. 또 다른 굴욕일 따름이다.
차기 일본 총리를 결정짓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코앞이다. 향후 한일 관계의 새로운 방향을 가늠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대한 시기다. 선거는 3파전 양상인데, 세 후보의 면면이 녹록지 않다. 세 사람 모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자위대의 헌법 명기에도 적극적이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이도 있다. 한일 관계 개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후보가 없다는 뜻인데, 누가 총리가 되든 향후 한일 관계는 험난한 길이 될 게 분명하다.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의 처분만 기다리는 외교로는 더 이상 얻을 것은 없다. 무엇보다 국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은 지속되지 못하는 법이다. 국내 정책도 그렇지만 외교 정책도 마찬가지다. 내년이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윤 정부가 이제부터라도 대일 정책 기조를 전면 전환해야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치밀하고 섬세한 대일 정책 논리를 개발하지 않으면 결코 일본으로부터 실효적 결과물을 끌어낼 수 없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