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호텔식·외식에 학원도 안 가는 꿈같은 일정 [세상에이런여행] ㉖
<청소년 서유럽 문명기행 (상) 영국 케임브리지>
근세 영국 귀족자녀 그랜드투어 모델 삼아
부산·서울 초중학생 16명 12박 14일 출발
호텔식, 외식에 학원 안 가는 꿈같은 일정
첫날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기차로 이동
‘대학도시’ 케임브리지에서 현지 교수 특강
수학, 노벨상 이야기 이어 영어로 질의응답
다양한 특징 각 칼리지 돌며 캠퍼스 여행
20년 넘게 유럽 배낭여행 인솔자로 일하면서 많은 여행자를 만났다. 대학생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30대 청년, 인생 후반기를 설계하는 은퇴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유럽 곳곳을 다니며 동고동락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유럽 전문여행사를 열었을 때 특히 주목한 분야는 초중학생들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어른보다 더 바쁜 학생들이 잠시나마 학습 부담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하자는 게 기획 취지였다.
부모가 따라가면 학생이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고, 부모나 학생 모두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기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경험도 한몫한 프로그램이었다. 자립심을 키우고,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직접 경험해서 열린 사고를 체화하는 데 여행만큼 훌륭한 도구는 없다는 개인적 생각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행 프로그램의 롤 모델은 17세기 후반 영국 귀족 자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자녀교육 여행 프로그램 그랜드투어였다. 당시 영국 귀족은 가문을 지키려면 후세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녀를 길게는 2년 이상 로마와 그리스로 여행을 보냈다고 한다. 역사와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도시들을 찾아 높은 수준의 지성과 문화적 안목을 기르는 이른바 엘리트 교육의 최종단계라고 생각했다.
■꿈같은 12박 14일
지난 2월 춘계방학 때 출발하는 것을 목표로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 20여 년 이상 배낭여행을 하다 보니 이전에 함께 돌아다닌 동지들이 많다. 지금도 SNS로 연락하면서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 이들에게 먼저 청소년 서유럽 문명기행 프로그램을 알렸더니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대학생일 때 필자와 함께 여행한 것을 계기로 사귀게 돼 결혼까지 한 A씨와 B씨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자녀를 보내겠다고 했다. 지인들이 여기저기 소개한 덕분에 순전히 초중학생 14명과 보조 인솔자 한 명 그리고 필자까지 16명이 출발하는 첫 팀이 성사됐다. 부산 학생만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여러 학생이 참가하게 됐다.
대한항공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들어갔다가 프랑스 파리, 스위스 취리히, 이탈리아 베니스~피렌체를 거쳐 로마에서 귀국하는 12박 14일의 일정이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침은 호텔, 점심과 저녁은 외식에 학원에는 안 가도 되는 꿈같은 일정’이었다.
부산과 서울에서 각각 모인 학생들은 인천공항 2청사에서 ‘합체’해 런던으로 떠났다. 예전에는 런던을 통해 입국할 경우 18세 미만인 사람은 ‘부모 미동행 시 가디언’이라는 양식의 서류를 제출해야 했지만, 요즘은 간소해져 인솔자만 있으면 입국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특강
런던에 도착하고 첫날 일정이 시작됐다. 이번 여행에서 부모들이 가장 기대했고 학생들도 바랐던 하이라이트인 케임브리지대학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태어나서 처음 런던 시내 교통시스템을 경험하기 위해 지하철과 2층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정액카드인 오이스터카드를 구입했다. 일정금액을 충전하면 런던에 머무르는 사흘간 지하철과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케임브리지에 가려면 지하철 킹스크로스 역으로 가야 한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타고 킹스크로스 역에 내려 케임브리지행 기차를 탑승하면 된다. 물론 케임브리지 왕복 기차표는 인터넷에서 미리 구입했다.
킹스크로스 역은 소설과 영화 <해리포터>로 유명해진 곳이다. 마법학교로 가려면 이곳에 있는 ‘9와 4분의 3’ 플랫폼에서 기둥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원래 역에는 이런 플랫폼은 없지만 소설과 영화 때문에 관광객 사진촬영용 스폿이 생겼다.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기차 출발 1시간 전 미리 도착해서 9와 4분의 3 플랫폼부터 먼저 구경한다. 기차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사진은 나중에 돌아올 때 찍기로 하고 케임브리지행 기차에 올랐다. 케임브리지는 런던에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한다.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울타리에 갇힌 캠퍼스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캠퍼스 같은 곳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폭동을 피해 케임브리지로 달아난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학생들이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이어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 유명인으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겸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 17세기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 인도의 네루 총리 등이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총리만 해도 초대 총리인 크리스 월폴 등 13명에 이른다. 외국 대통령 등 정부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도 30명이나 된다. 현재 영국 국왕인 찰스 3세 등 이 학교 출신 국내외 국왕만 해도 9명이다.
케임브리지에서는 생화학과에 재직 중인 마틴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지인이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물리학 박사인데 그의 소개로 마틴 교수를 알게 됐다. 대학교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어서 특강은 학교 근처 유학원 강의실을 빌려 진행됐다.
강의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수학의 미적분 외에 케임브리지대학교 노벨상 수상자 이야기와 학교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1시간 30분간 이어졌다. 이 대학교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130명이나 나왔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학생들은 매우 흥미로워했다.
강의가 끝난 뒤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어떤 학생은 통역을 통하지 않고 영어로 직접 질문했다. 요즘 학생들은 확실히 영어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의 강연과 질문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다.
학생들은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는 캠퍼스 곳곳을 구경했다. 도보여행은 케임브리지대학교를 구성한 31개 칼리지 중 제일 유명한 세인트존스칼리지, 가장 큰 트리니티칼리지, 성당이 아름다운 킹스칼리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가장 자금이 풍부한 ‘부자’ 학교인 세인트존스칼리지 출신 인물로는 1958년과 1980년 노벨상 화학상을 두 번이나 받은 프레더릭 생어 교수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가 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도 이 칼리지 졸업생이다.
수학과 물리학으로 특화된 트리니티칼리지는 노벨상 수상자를 제일 많이 배출했는데, 옥스퍼드대학교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냈다고 한다. 필자의 지인은 “그래서 트리니티칼리지는 세인트존스칼리지와 묘한 경쟁관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킹스칼리지성당과 학교 건물이 가장 화려하고 예쁜 킹스칼리지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암호를 해독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실존 인물이었던 앨런 튜링 이야기가 소개됐다. 학생들은 튜링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킹스칼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잔디마당에 있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나무였다. 뉴턴과 시인 바이런, 다윈, 베이컨, 찰스 3세 국왕이 이곳 출신이다.
학생들은 퀸스칼리지 근처에 있는 ‘수학의 다리’와 도시 전체를 휘감아 도는 캠강의 나룻배 모양의 펀팅을 바라보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런던 킹스크로스 역으로 돌아가 플랫폼 9와 4분의 3에서 빨려드는 것 같은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가 만족한 하루였다.
손준호 준투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