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전직 언론인의 '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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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엘리트 의식·권력 지향성 유혹 못 이겨
‘기자 초심’ 이탈, 그릇된 ‘재취업’ 선택
이진숙 방통위원장 등 극단 행보 보여
부끄러움 실종, 직업 윤리 기대 어려워

올림픽 열기에 다소 가려졌긴 하지만, 최근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은 단연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다. 이진숙은 여러모로 극단적인 행보를 보여준 인물이다. 언론사 사장 출신이면서도 퇴직 후에는 보수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강성 발언으로 주목받은 전력이 있다. 방통위원장으로서는 임명 당일 위원회 구성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공영방송 이사진을 임명하는 파격적 행태로 하루 만에 탄핵 대상에 올랐다. 명색이 장관급인 위원장의 역할은 현 정권의 ‘공영방송 탈환’을 위한 정치 게임에서 일회성 행동대원에 불과했다.

이처럼 극우 유튜버 출신에게나 어울릴 법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이진숙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과거가 있다. 이진숙은 MBC 기자 시절 보도국장 추천제를 무력화하려는 회사 측에 맞서 노조 파업에 앞장선 강성파였고, ‘최초의 여성 종군 기자’로 한때는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이었다. 이 시절의 이진숙에게서 ‘좌파에 장악당한 공영방송 탈환’을 위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든 보수 전사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후의 상반된 행보를 단지 언론인의 예외적인 ‘변절’로만 보기도 어렵다. 언론인 중에는 유사한 전향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악명을 떨친 이동관 전 방통위원장이나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역시 기자 출신이다.

언론인 변절 사례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 인물의 상반된 이력 사이에는 표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기자들은 초년 시절부터 사회 최상층과 상대하면서 엘리트 의식과 특권 의식을 습득하게 되고, 이는 권력 지향성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늘 대우만 받다 보니, 이 대우가 언론에 대한 도덕적 기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대단한 신분이라서 그렇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퇴직 후 느끼는 사회적 박탈감은 기자 직군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변절 언론인의 상반된 모습을 이어주는 고리는 바로 이 엘리트 의식과 권력 지향성이다.

이진숙 기자 역시 이명박 정권 때는 한직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가 발탁되어 파격적인 고속 승진의 출세길을 걸어 지역 MBC 사장에까지 올랐다. 이 선택으로 기자 시절의 엘리트적 자존심은 살리게 되었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변절’이었다. 덜 극적이긴 하지만 기자가 출입처에서 쌓은 인맥을 활용해 정치권, 관계, 대기업에 진출하는 경로는 일상적인 패턴이 되었다. 평기자 때는 권력과 자본에 당당한 언론인을 꿈꾸다가도, 중견 간부쯤 되면 취재원과 원만한 관계 관리에 신경쓰면서 사실상 재취업 준비에 들어간다.

외부의 차가운 시선과 달리 이진숙은 이 선택을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자리 이동쯤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평생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언론인 이영희 선생은 기자에게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이 필수 덕목이라고 말했다. 언론인이 특별 대우와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지면 결국 초심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지적이다.

언론인의 변절 사례에서는 기자 직업 경로 자체의 구조적 문제점도 엿볼 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민주화된 사회에는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정치, 종교, 언론 등의 ‘장’(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가령 언론의 ‘장’에서 성공이란 직업 가치에 비추어 뛰어난 업적 성취를 뜻하는데, 이 업적은 정치나 경제의 ‘장’처럼 감투나 돈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의 ‘장’에서 성공한 언론인은 얼마나 있을까? 최근 모든 조사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해답은 자명하다.

이러한 비극적 실태 이면에는 기자 직업 구조의 왜곡이란 원인이 있다. 한국 언론사에는 아무 업무나 잘 처리하는 고만고만한 기자만 넘쳐날 뿐 ‘전문가’가 드물다. 이들은 경력이 쌓이면 부장이나 국장 등 보직을 맡게 되지만, 이들의 경험이 젊은 기자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성을 띠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점차 조직에서 퇴진 압박을 느끼면서 외부에서 돌파구를 모색하게 된다. 설혹 그 선택이 직업적 가치를 위협하는 악역일지라도 그렇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종사자들이 내부적 가치보다는 외부에서 삶의 목적을 찾게 되어 언론이 독립된 ‘장’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기자들의 그릇된 ‘재취업’을 금기시하는 직업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과거에는 그나마 윤리적 비난을 피해 조용히 이직하던 것이 관행이었지만, 이제는 ‘영전’과 ‘출세’를 드러내 놓고 축하하는 분위기라는 점은 더욱 우려스럽다.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직업 사회에서 높은 직업 윤리와 신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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