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못한 인생 말년, 모차르트는 왜 갑자기 눈을 감았나? [세상에이런여행] ㉕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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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in오스트리아 ⑦ 짧은 인생·끝>

전쟁으로 수입 줄어 심한 자금난 시달려
낭비 심하고 저금할 줄 몰라 어려움 자초
도박에 알코올 중독까지 겹쳐 재산 탕진

어릴 때 건강 나빠 세 차례나 죽을 위기
유작 ‘레퀴엠’ 작곡하다 갑자기 눈 감아
독살설 등 사인 둘러싸고 각종 추측 난무

전염병 사망 오해로 장례 미사도 못 치러
평민 공동무덤 묻힌 탓에 유해까지 실종
사망 100주기 때 기념비 중앙묘지로 이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전기학자나 역사학자는 모차르트를 ‘빈곤에 시달리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라고 묘사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본 사람이라면 모차르트가 능력에 맞는 대우도 받지 못하다 죽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공동묘지의 평민 묘역에 묻혔기 때문에 ‘홀대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서 이 같은 평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모차르트가 빈곤했거나 홀대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말년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엄청난 돈을 벌었던 대작곡가가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는 힘든 시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그리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의 인생 마지막을 살펴보려면 지하철을 타고 빈 외곽으로 나가야 한다.

관광객들이 빈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비를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관광객들이 빈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비를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사치가 불러온 몰락

모차르트가 전성기를 보냈던 모차르트하우스가 있는 구시가지의 슈테판스플라츠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3개 정류장을 지나 로쿠스가세역에서 내린다. 이곳은 빈의 링슈트라세 바깥에 있는 지역이다. 빈에 성벽이 있던 시절에는 성벽 외곽이었다. 시내와 그다지 많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도 외곽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1787년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 탓에 음악 연주회 손님이 줄고 작곡을 의뢰하는 고객도 모두 사라져 모차르트의 재정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큰돈을 벌고도 저금이라고는 몰랐던 모차르트는 자금난에 쪼들리다 집세 부담을 덜기 위해 란트슈트라세 75번지로 이사를 갔다. 오페라 ‘돈 조반니’와 현악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작곡한 곳은 여기였다. 여기에서도 자금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집을 더 싼 곳으로 다시 옮겼다.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를 작곡한 란트슈트라세 75번지 1층에 설치된 모차르트 흉상.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를 작곡한 란트슈트라세 75번지 1층에 설치된 모차르트 흉상. 남태우 기자

로쿠스가세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가다 쇼텐토르역 앞에서 내린다. 역 바로 앞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 나타나고 공원 뒤편에 뾰족한 첨탑 두 개가 솟은 교회가 보인다. 19세기 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암살 위기를 넘긴 뒤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만든 교회다.

교회 옆의 베링거슈트라세를 따라 3분 정도 걸으면 베링거슈트라세 26번지가 나온다. 계속 자금난에 시달린 모차르트는 1788년 6월 이곳으로 이사를 가 1789년 초까지 살았다. 이곳은 지금도 빈 중심가까지 걸어서 20분 이상 걸리는 곳이다. 모차르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벽 밖이었기 때문에 더 외곽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 일대 집값은 시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 그가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쓴 곳은 여기였다. 이곳 입구에 이런 사실을 알리는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가 살던 때의 건물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섰다.

돈에 쪼들린 모차르트가 살았던 베링거슈트라세 26번지 전경. 남태우 기자 돈에 쪼들린 모차르트가 살았던 베링거슈트라세 26번지 전경.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는 1784~1787년 사이에 매년 5000~1만 굴덴을 벌었다. 빈에서 최고 소득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1787년 후반기부터 빚을 많이 지고 재정난에 시달렸다. 100굴덴이 없어 곳곳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씀씀이가 헤펐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와 주고받은 편지는 물론 다른 자료를 살펴보면 사정은 다르다. 근본적인 원인은 모차르트에게 있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사람은 콘스탄체가 아니라 모차르트였다. 그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매우 신경을 썼다. 옷, 신발은 늘 최신 유행의 고급만 고집했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연주회를 진행하는 곳은 대부분 왕의 궁전이나 귀족의 대저택이었다. 연주회를 마치면 왕이나 귀족이 대접하는 진수성찬을 즐겼다. 그들로부터 값비싼 선물을 받았다. 옷, 신발, 보석 등 선물은 다양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에 익숙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어 했고 생활수준에서 귀족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도박을 즐겼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당시 빈 귀족의 오락거리는 음악과 도박이었다. 그들은 밤에 연주회를 보러 가지 않으면 당구장이나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다. 귀족 친구가 많았던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연주회, 작곡 시간이 아니면 당구장에서 공을 치거나 노름을 했다. 거기서 탕진한 재산이 만만치 않았다.

잘츠부르크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는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부모가 통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빈에 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직접 돈을 벌었고 주변에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 버는 족족 돈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 작곡가 겸 음악사학자인 앨런 크란츠는 모차르트 전기에 ‘모차르트는 아량, 충동성, 과소비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때부터 절제를 모르면서 버릇없이 자랐다.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갔다. 돈은 마치 물처럼 그의 손에서 흘러나갔다’ 면서 ‘모차르트의 어머니조차 ‘볼프강은 새 친구를 사귀면 늘 인생이나 재산을 모두 쏟아부을 것처럼 행동한다’고 하소연했다’고 적었다.


■대가의 비참한 최후

모차르트는 1790년 11월 말 라우헨슈타인가세 8번지로 집을 옮겼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아파트였다. 그는 이곳에 이사를 간 뒤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곡을 썼다. 발세그 스튜파흐 백작에게서 의뢰를 받고 유작이 된 미완성곡 ‘레퀴엠’을 작곡한 곳은 이 집이었다. 또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의 자비’도 작곡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이듬해 12월 5일 이곳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건물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에는 ‘슈테플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 건물 7층 스카이 바에는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고, 건물 뒤편에는 명판이 붙여졌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자리에 세워진 슈테플백화점 뒤쪽 벽에 모차르트 기념 동판이 붙어 있다.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자리에 세워진 슈테플백화점 뒤쪽 벽에 모차르트 기념 동판이 붙어 있다.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의 마지막을 지킨 의사 클로셋이 발행한 사망 증명서에는 사망 원인이 ‘속립진열’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것이 어떤 질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차르트가 죽기 전인 11월 아내에게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아. 독을 먹은 모양이야“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이후 많은 의학 전문가가 모차르트의 사인을 분석했지만 결과는 늘 달랐다. 앞으로도 사인을 둘러싼 논쟁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100% 명확한 사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덩치가 작았던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튼튼한 아이가 아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각종 병에 걸려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여섯 살 때 빈에 처음 가서 성홍열에 걸려 생사를 헤맸다. 이때 간을 상했는데 평생 신장 질환에 시달린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빈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천연두, 네덜란드 헤이그에 갔을 때에는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이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차르트 장례미사가 열렸던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 장례미사가 열렸던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가 이렇게 자주 병에 시달린 것은 각종 전염병이 수시로 유행한 게 이유일 수 있지만, 그가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어 체질적으로 약한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모유 수유를 하지 않고 보리죽만 먹였는데, 이 때문에 모차르트는 늘 영양실조에 허덕였다는 게 일부 전기학자의 주장이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거행됐다. 관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인이 전염병 때문이라고 짐작한 대성당 사제주임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장례 미사가 거행된 곳은 대성당 외부의 십자가 경당 앞이었다. 지금 십자가 경당의 철문 뒤에는 모차르트의 장례 미사가 열린 장소임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 있다.

‘1791년 12월 6일 불멸의 작곡가 모차르트의 육체는 이곳에서 축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의 관은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안에 설치된 모차르트 기념 동판. 남태우 기자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안에 설치된 모차르트 기념 동판. 남태우 기자

■마지막 흔적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앞에서 잠시 묵념한 뒤 그라벤거리를 거쳐 호프부르크왕궁으로 이어지는 콜마르크트거리를 따라 간다. 이 거리의 종점은 미하엘러플라츠광장인데, 이곳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장크트미하일러교회가 있다.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를 위해 첫 추모 미사가 열린 곳은 여기였다.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것도 이곳이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잘 살펴보면 한쪽 구석에 이런 내용을 담은 동판을 찾을 수 있다. 대다수 외국인 관광객은 교회의 역사를 잘 몰라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광장 정면에 보이는 호프부르크왕궁 사진 찍기에만 바쁘다. 역시 여행에서는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이다.

모차르트의 추도 미사에서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장크트미하일러교회.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의 추도 미사에서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장크트미하일러교회. 남태우 기자

교회에서 나와 호프부르크왕궁을 가로질러 왕실 정원인 부르크가르텐으로 간다. 정원 한쪽 모퉁이에 조그맣게 따로 단장된 공간이 나타난다. 온전히 모차르트를 위한 공간이다. 모차르트 동상이 서 있고 동상 바로 앞에는 봄여름이면 ‘음표’ 모양의 꽃이 피어나는 화단이다.

모차르트 동상은 독일어로 ‘모차르트 덴크말’이라고 부른다. 동상은 악보대를 든 모차르트를 형상화했다. 정면의 부조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두 장면을 의미한다. 뒷면의 부조는 여섯 살인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 난네를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담았다.

모차르트 동상을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동상과 주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날씨가 따뜻한 4~5월이다. 이 무렵이면 부르크가르텐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이 화사하게 핀다. 동상 앞에는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꽃밭이 조성된다. 꽃밭 앞에서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르크가르텐에 세워진 모차르트 동상. 남태우 기자 부르크가르텐에 세워진 모차르트 동상.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 동상에서 길을 건너 71번 트램을 탄다. 목적지는 빈 중앙공동묘지다. 이곳에 가는 이유는 모차르트의 기념비가 있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같은 유명 음악가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기념비가 있는 곳은 중앙공동묘지 ‘32 A-55’ 구역이다.

모차르트는 원래 중앙공동묘지가 아니라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때만 해도 평민의 경우 개인무덤이 아니라 공동무덤을 쓰는 게 일반적이어서 모차르트도 공동무덤에 묻혔다. 나중에는 그 위에 다른 공동무덤을 또 만들었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유해를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돼 버렸다.

빈 시청은 모차르트가 죽고 68년 뒤인 1859년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모차르트 기념비를 세웠고, 사망 100주기이던 1891년에는 중앙공동묘지로 옮겼다. 기념비는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단에는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뮤즈의 조각이 설치됐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뮤즈는 음악 같은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이니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를 추모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단에는 대리석 비석 몸체에 모차르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었다.

빈 중앙공동묘지의 모차르트 기념비. 왼쪽은 베토벤 무덤이다. 남태우 기자 빈 중앙공동묘지의 모차르트 기념비. 왼쪽은 베토벤 무덤이다. 남태우 기자

모차르트 기념비 주변은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이 둘러쌌다. 의도는 분명하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최고의 음악가라는 걸 내세우기 위해서다. 다들 베토벤을 ‘음악의 황제’라고, 모차르트를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러 베토벤을 한 수 높게 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셈이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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