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일본, ‘후퇴’를 선언해야 한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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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뒤의 세상 / 우치다 타츠루 외

인구 감소·고령화가 기본값
후퇴 전략으로 피해 최소화
한국과 닮은 이야기에 공감


일본 도쿄에서 한 노인이 보행을 돕는 손수레에 의지해 걸어 가고 있다. <한 걸음 뒤의 세상>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후퇴 현상이 심화하는 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말한다. 연합뉴스 일본 도쿄에서 한 노인이 보행을 돕는 손수레에 의지해 걸어 가고 있다. <한 걸음 뒤의 세상>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후퇴 현상이 심화하는 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말한다. 연합뉴스

우리는 ‘임전무퇴’라고 배웠는데 사무라이의 나라에서 ‘후퇴학’이라니…. 그것도 합기도 7단을 비롯해 도합 13단의 무도인인 우치다 타츠루가 후퇴학을 꺼내 들다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오해였다. 후퇴학은 전진의 반대 의미로서 앞으로 나아가지 말고 후퇴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발전이 아닌 후퇴 현상이 심화하는 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는 의미였다. 일본에서는 나라현립대학 주최로 후퇴학 심포지엄까지 열렸다고 한다. 일본의 후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대학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했다니 높이 평가할 만하다. 만약 지금, 한국에서 이런 심포지엄을 열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거리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을 엮기 위해 필진들에게 일일이 원고 의뢰문을 보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한 걸음 뒤의 세상>은 일본의 지성 16인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전문가적 관점으로 본 일본 사회의 후퇴론을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시골빵 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시골빵집을 운영하는 와타나베 부부와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의 저자 히라카와 가쓰미의 이야기도 담겼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나서야 세상에 알려진 이들이 후퇴론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우치다 타츠루는 국력이 쇠퇴하고 보유한 국민자원이 감소하는 지금의 일본에 후퇴는 긴급한 의제라고 소리 높인다. 병이 나면 원인이나 증상,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 아픈데도 병이 난 걸 얘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 병세만 심해질 뿐이다. 우치다가 말하는 후퇴는 국력이 쇠퇴하는 현실에 적절하게 대응해 연착륙하자는 의미로, 위기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국력이 쇠퇴하는 가장 큰 원인이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봉책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으니 앞으로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변수가 아니라 디폴트 값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최고령 국가 단계에 진입할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노인뿐인 나라’라면 어떤 제도를 마련해야 사람들이 나름대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일본은 세계에 모델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후퇴 전략으로 피해를 최소화해 연착륙에 성공했다고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제2차 인클로저 운동(울타리 치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는 주장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인구 감소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대규모로 만들어져도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도시에 밀어 넣으면 자본주의는 연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문제가 겹치면서 일본이 쇠락 일로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쩌면 적극적인 지방소멸 대책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사상가 홋타 신고로는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서는 다음 처방전 마련보다 그동안의 처방이 왜 효과가 없었는지를 밝히고 재앙을 맞기 전에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사상가 사이토 고헤이는 오로지 경제 성장만을 바라보며 미지의 시장을 개척해 온 자본주의는 커다란 한계에 봉착했기에 지금 당장 망설임 없이 후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퇴란 위기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로 시스템 변화를 꾀하는 혁명 같은 전진이라는 것이다. 또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 정치도 참담하지만 그것보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력에 투표하는 유권자의 무지가 우려스럽다며 일본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다.

세상 어디든 문제없는 곳이 있을까. 문제 자체보다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아이만큼 솔직하지 않아서 문제를 키운다. 발전을 이야기하려면 내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 책에 나오는 논의들은 일본이라는 고유명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한국이라고 넣어도 전혀 위화감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사실은 일본이라고 쓴 단어를 한국이라고 읽었다. 후퇴학이 곧 한반도로 몰려들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다. 우치다 타츠루 외 지음/박우현 옮김/이숲/272쪽/1만 8000원.


<한 걸음 뒤의 세상> 표지. <한 걸음 뒤의 세상>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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