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단풍 여행하기…임금님도 반한 ‘다섯 궁궐’ 속으로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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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 도심 속 단풍 명소로 인기
해설 프로그램 이용하면 역사여행 ‘덤’
경희궁, 아늑한 정원과 낙엽길 낭만적
창경궁, 연못 위 나무 반영 보며 산책
경복궁·덕수궁 주변 길 풍광도 유명

경희궁 내 정원과 잔디밭을 온통 낙엽이 감싸안고 있다. 경희궁 내 정원과 잔디밭을 온통 낙엽이 감싸안고 있다.

더웠다 쌀쌀했다 오락가락 날씨지만 자연은 완연한 가을옷을 입었다. 북에서 남으로 단풍이 세상을 알록달록 물들이고 있다. 산꾼들은 단풍 산행에 나서겠지만, 도시에서도 단풍을 즐길 기회는 많다. 특히 서울 한복판에서 오색찬란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조선시대 고궁들이다.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서궐’

고궁을 만나기 위해 옛 한양도성 일대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경희궁이 자리한다. 정문 격인 홍화문으로 들어서자 빌딩 숲속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숭정전 입구인 숭정문까지 이어진 길 양옆으로 아늑한 정원과 잔디밭이 방문객을 맞는다.

정원과 화단에는 크고 작은 나무 수백 그루가 푸르렀던 잎을 벗어던지는 중이다. 나무 밑동 주변과 산책로 곳곳에 따스한 노랑·빨강·갈색 빛깔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누군가 낭만을 떠올렸는지, 길 한편에 낙엽을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산책하는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경희궁(慶熙宮)은 도성의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로도 불렸다. 이름처럼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궁이었지만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을 위해 전각을 헐어 자재로 썼고, 일제강점기엔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다. 면적도 절반으로 줄어 옛 위용은 ‘서궐도(西闕圖)’ 그림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규모는 쪼그라들었지만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룬 형태는 그대로다. 기괴한 자태의 느티나무도 40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궁의 역사를 전한다.

경희궁 숭정문 앞에는 이맘때쯤 낙엽 주단이 깔린다. 경희궁 숭정문 앞에는 이맘때쯤 낙엽 주단이 깔린다.
경희궁 화단 사잇길에 누군가 낙엽으로 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경희궁 화단 사잇길에 누군가 낙엽으로 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경희궁은 올 9월부터 보수 공사를 시작해 연말까지 숭정전만 관람이 가능하다.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잔디밭과 정원 일대를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천천히 거닐어 볼 만하다. 사각사각, 발아래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가 도시의 묵은때를 씻겨 낸다. 특히 이맘때쯤 숭정문 앞은 낙엽 주단이 깔려 콘크리트 바닥의 삭막함을 덮는다.

경희궁 서쪽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조성돼 있다. 마을 안쪽 돈의문역사관에서는 조선시대와 개항 이후 돈의문 일대 역사, 새문안 동네가 돈의문박물관마을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특히 옛 식당 ‘아지오’와 ‘한정’ 건물을 활용한 역사관 자체도 마을의 역사를 간직해 인상적이다.

아지오 2층 네모 창 너머로는 앞서 거닐었던 경희궁 정원이 그림처럼 바라다보인다. 역사관 안팎에는 옛 화장실과 경희궁 담장의 흔적이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 중이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도시재생의 현장. 미래 세대를 위한 고민이 엿보인다.

돈의문역사관(아지오) 2층 창에서 바라다보이는 경희궁. 돈의문역사관(아지오) 2층 창에서 바라다보이는 경희궁.
돈의문역사관 옆에는 경희궁 담장을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돈의문역사관 옆에는 경희궁 담장을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그래픽=류지혜 기자 birdy@ 그래픽=류지혜 기자 birdy@

■왕의 효심과 아픈 역사 서린 ‘동궐’

서궐 주변 탐방을 마치고, 동궐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조선시대 다섯 궁궐이 있다. 이 중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창경궁 일대를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경복궁에 이어 건립된 창덕궁은 후원 등이 잘 보전돼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루 방문객 수가 제한돼 후원을 둘러보려면 온라인 예약을 하거나 당일 현장 예매를 해야 한다. 인터넷 예약에 실패해 아침 일찍 창덕궁 돈화문을 찾았지만 현장 표도 구하지 못했다.

매표소 옆에 우뚝 선 은행나무로 아쉬움을 달랜 뒤 창덕궁과 동쪽으로 맞닿은 창경궁으로 향했다.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로, 창덕궁의 생활공간이 좁아지자 정희왕후(세조 비), 안순왕후(예종 비), 소혜왕후(덕종 비) 등 대비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창경궁은 입구인 홍화문부터 여느 궁궐과 다르다.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나 있는데, 남·서·북쪽은 구릉지이고 동쪽은 평지인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보물 옥천교를 지나 명정문으로 이어진다. 옥천교의 무지개 아치 사이에는 나쁜 기운을 막는 도깨비 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다리 아래 옥천의 물길은 춘당지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지나 한강으로 이어진다.

창경궁 옥천교. 물줄기는 청계천을 지나 한강으로 이어진다. 창경궁 옥천교. 물줄기는 청계천을 지나 한강으로 이어진다.
창경궁 춘당지 주변이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었다. 창경궁 춘당지 주변이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었다.

창경궁 북쪽에 위치한 춘당지는 도시에서 보기 힘든 대규모 연못이다. 둘레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돼 느린 걸음으로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 좋다. 물은 맑은 편이 아니지만, 다채로운 빛깔이 수면 위를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다. 연못 위로 잎을 드리운 각양각색 나무들의 반영이다. 수면을 떠다니는 낙엽 사이로 크고 시커먼 물체가 유영한다. 수십 년은 묵은 것처럼 보이는 잉어들이다. 단풍·낙엽·연못, 어느 배경이건 담는 족족 그림이 된다.

창경궁은 일제강점기 때 특히 시련을 겪은 궁궐이다. 궁내 건물 대부분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은 뒤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지금의 춘당지도 원래는 왕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직접 농사를 짓던 논(내농포)이 있던 자리인데, 일제가 논을 파헤쳐 큰 연못을 만들었다. 1983년 동물원을 이전하면서 시작된 창경궁 복원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춘당지 물속을 한가로이 유영하는 잉어들. 춘당지 물속을 한가로이 유영하는 잉어들.
춘당지 주변으로 소복이 쌓인 낙엽이 가을볕을 받아 빛난다. 춘당지 주변으로 소복이 쌓인 낙엽이 가을볕을 받아 빛난다.

■조선 으뜸 ‘경복궁’과 단풍 으뜸 ‘덕수궁’

고궁 단풍 여행에서 조선 으뜸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을 빼놓을 수 없다. 궁궐 주변에서부터 단풍이 눈길을 끈다. 경복궁 북쪽 담장과 청와대 사이를 지나는 ‘청와대로’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 탓에 눈이 부시다. 경복궁은 청와대 주변을 거닐다 북쪽 신무문으로 입장해도 좋고, 동문 입구 주차장을 통해 남쪽 흥례문으로 들어가도 된다.

경복궁을 대표하는 근정전을 향해 근정문으로 들어서자 단풍 못지않은 화려한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국인들이다. 색색의 치마·저고리가 궐내 가을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경복궁 내 수많은 문화재 건물 중에서 특히 경회루에 오랫동안 발길이 머문다. 연못에 비친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가을 정취를 물씬 뿜어낸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이나 신하들을 맞이해 왕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누각에 올라 조선 왕실의 흥과 풍류를 짐작해 본다.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를 지나는 청와대로의 가로수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를 지나는 청와대로의 가로수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경복궁 경회루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경복궁 경회루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경회루 연못에 반영된 높고 푸른 하늘이 가을 정취를 배가한다. 경회루 연못에 반영된 높고 푸른 하늘이 가을 정취를 배가한다.

길에서 만나는 단풍으로는 덕수궁 돌담길만 한 곳이 없다. 가을단풍길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단풍 명소가 된 지 오래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로수뿐만 아니라 담장 안쪽 나무들도 눈에 들어온다. 덕수궁의 단풍이다. 특히 궁내에서 보면, 서양 건축 양식의 석조전과 어우러진 단풍이 이국적인 풍광을 그려낸다.

석조전 뒤편 돈덕전은 붉은 벽돌과 초록색 창틀 외관부터 이채롭다. 대한제국 시절 영빈관으로,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최근 재건돼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바로 앞에 힘겨운 자세로 버티고 선 노거수가 돈덕전의 수난을 말하는 듯하다. 덕수궁 동쪽에는 연지가 자리한다. 수면 전체가 녹색 연잎으로 뒤덮였다. 그 위로 낙엽이 떨어져, 점점이 물감을 찍은 듯 점묘화처럼 보인다.

조선의 다섯 궁궐은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단풍 구경을 하면서 궁궐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이야기를 품은 고궁의 단풍은 한층 다채롭게 다가온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덕수궁 단풍은 석조전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덕수궁 단풍은 석조전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최근 재건을 끝내고 일반인에게 개방된 덕수궁 돈덕전. 최근 재건을 끝내고 일반인에게 개방된 덕수궁 돈덕전.
덕수궁 연지를 점점이 뒤덮은 연잎과 낙엽의 모습이 점묘화를 닮았다. 덕수궁 연지를 점점이 뒤덮은 연잎과 낙엽의 모습이 점묘화를 닮았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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