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귀가 순해지는 음악, 누려야 마땅할 문화
해운대에서 만난 부산 예술문화
무대와 객석의 호응 눈길 끌어
시간과 공간 가로질러 현재화
신의 세계로 이끄는 음악의 힘
언제 어디서든 누리는 예술문화
부산이 꿈꾸는 도시의 지향 돼야
이번 주에만 연달아 이틀 음악회에 갔다. 공교롭게도 평소에는 발길이 뜸한 해운대문화회관이라는 같은 장소, 평일 같은 시간대인 오후 7시 30분에 열린 공연이었다. 발길이 뜸한 곳이라지만 전철 2호선 장산역이 바로 옆이어서 접근성이 뛰어났고, 객석의 반응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부산의 16개 구·군 가운데 하나인 해운대구가 운영하는 공연장에서 부산 문화의 가능성 혹은 미래를 그려 보기에 좋은 기회였다.
17일 열린 ‘앙상블 크로노토프’(예술감독 김정화) 정기 연주회는 실내악의 작은 향연이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음악회는 좀체 접하기 어려운 작곡가 마랭 마레, 장 밥티스트 바리에르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게 되는 클로드 드뷔시에 이르기까지 바로크 시대와 근현대를 아우르는 프랑스 음악 세계로 객석을 이끌었다. 두 대의 첼로와 한 대의 바이올린, 피아노가 호흡을 맞췄다.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 만나는 크로노토프(chronotope)라는 미하일 바흐친의 문예이론을 연주 단체의 이름으로 내걸고 있듯, 음악회는 예술의 시공간을 확장하여 그 음악적 맥락을 ‘지금 여기’의 관계망 속에서 찾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열정이 느껴지는 객석이 보기에 따라서는 더 잘 준비되어 있는 듯한 연주회였다. 공연의 성패는 결국 객석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음악의 길을 애써 안내한 무대 위 연주자들도 더불어 돋을새김 됐다.
올해 창단 30돌을 맞은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BSO, 예술감독 오충근)가 18일 해운대문화회관 해운홀 무대에 올린 ‘노자와 베토벤’은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공연의 걸작’이었다.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베토벤’ 역의 지휘자 오충근과 ‘노자’ 역의 철학자 최진석이 진행한 토크 콘서트는 이 프로그램의 8년 연륜답게 초절정 기교(?)가 묻어났다. 처음 만나 의기투합해서는 같이 교수직을 그만두고 콘서트를 함께하기로 했다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화음이 인상적이었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지휘자가 철학자에게 ‘음악이 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시로 일어나고 예로 서고 음악으로 이룬다)이라고 말했다. 문자로 된 것 중 가장 높은 게 시인데, 신의 세계에는 문자가 없고 소리만 있다. 음악은 사람을 진동으로 두들겨 패 신이 되고 우주가 되게 한다.”
개인적으로 대학 진학을 앞둔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면 작곡과와 신학과를 놓고 한참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신문사에 들어와서는 음악 담당과 종교 담당을 하던 문화부 일선 기자 시절이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무대 위 철학자의 말이 가슴속에 환한 등불 하나를 켜 놓은 듯했다. 흠잡기에만 매몰된 언론인 생활의 마감을 앞둔, 마침 귀가 순해지는(耳順)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악기만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 선율은 더 절절하고, 더 풍성해서 좋았다. 음악과 신과 사람에 관한 대화 속에 드보르자크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E장조 작품 22’, 슈타우다허의 피리 협주곡 ‘하루 같은 인생’, 김한기 편곡의 ‘고향의 봄’,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작품 48’이 공연장에 긴 여운으로 울려 퍼졌다. 객석의 반응은 최근 들어와 좀체 만나기 힘들 정도로, 좀 놀라운 데가 있을 만큼 열광적이었다.
이런 정도의 예술문화 향유가 해운대의 전유물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교육 등에 있어 부산 안의 동서 격차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는 마당에 둘러보면 공연장 또한 영화의전당 벡스코 등이 있는 동쪽에 편중되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부산의 16개 구·군 어느 곳의 주민이든 누릴 수 있는 ‘예술문화 15분 도시’가 자리 잡아야 한다. 공연장이든 프로그램이든 언제든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할 터이다.
인간 정신의 건강을 위해 예술문화의 편식도 경계할 일이다. 올해 28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내홍을 딛고 지난 4~13일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지만 그동안 지역 문화계 안에서는 부산시와 정부의 지원이 영화에만 쏠려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그런 참에 13~16일 부산시민회관 일대에서 열린 제1회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은 음악 연극 무용 거리예술 코미디 마술 등 다채로운 장르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 줘 고무적이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은 독립된 나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품격 있는 예술의 도시, 문화의 도시는 부산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종착지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