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세권 개발에 6800억 채권 발행… ‘녹색’은 어디까지? [33조 녹색채권 어디에]
기준 모호·감시 허술 오랜 문제
고탄소 사업장 손쉽게 친환경 인정
탄소를 배출해도 ‘녹색’ 마크를 받을 수 있다. 이전보다 온실가스나 유해 물질이 적게 나오면, 해당 설비나 프로젝트는 녹색 사업으로 인정된다. 다만 온실가스를 얼마나 줄이고, 줄인 뒤 남은 양이 어느 정도야 하는지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기준이 모호한데 외부 감시마저 허술하다 보니, 시장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웬만하면 녹색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엄격한 잣대로 사업자들의 불만을 살 필요가 없고, 행정 기관 입장에서도 녹색을 많이 인정할수록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탄소 뿜는 친환경 선박과 항공기
2021년 한해에 국내 선박회사들은 ‘친환경 LNG추진선’ 건조 목적으로 모두 5개 4236억 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LNG 원료를 쓰는 선박은 기존 벙커C유를 쓸 때보다, 황산화물 등이 거의 나오지 않고 온실가스 배출량이 20~25%가량 줄어든다.
같은 해 대한항공은 친환경 항공기인 보잉 B787-9호를 도입하는 데 3500억 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이 비행기는 탄소복합재료를 활용해 동체가 가볍다. 연료 소모가 줄고 25% 정도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있다.
그럼에도 선박과 항공기는 근본적으로 고탄소 배출원이다. 전 세계 온실가스의 3%가량은 선박에서, 2.5%가량은 항공기에서 나온다. LNG추진선과 B787-9도 온실가스 배출량이 기존 대비 4분의 3 수준이므로, 온난화에 상당히 기여한다. 이미 LNG추진선이 친환경 이름을 달고 급증한 것에 대해 국제사회 안팎에서 탄소제로에 대한 역행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정유회사와 화력발전소가 녹색채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2019년과 2021년 정유회사들이 선박용 저유황 해상유 공급을 위해 각각 5000억 원과 4000억 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2021년에는 4개 화력발전소에 탈황 설비 설치 등 환경 개선 명목으로 3900억 원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이 밖에도 환경 개선 목적으로 석유단지와 제철공장 등에 지금까지 7000억 원 넘는 녹색채권이 투입됐다.
고탄소 사업장의 녹색채권 발행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전환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사업장이 되레 친환경적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고, 오염물질 감소가 사업 연장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기후단체들은 고탄소 사업장의 전환계획 수립 뒤 녹색금융을 투입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일부가 녹색이면, 전체가 녹색?
녹색채권은 친환경 건설에도 투입되는데, 여기서도 ‘녹색’의 범위가 모호하다. 에너지효율성과 친환경성 등이 인정된 건설 사업에는 녹색채권이 투입될 수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에너지 과소비 시설인 데이터센터 건축에도 녹색채권이 쓰이기도 했다. 이미 지어진 건물의 인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600억 원의 녹색채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녹색활동은 건축 과정에 발생하기 때문에, 건물 인수는 녹색 프로젝트와의 직접성 연관성이 떨어진다.
수도권 지역 역세권 개발 사업들에도 6800억 원의 채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부지 내 주택 단지의 에너지자립도가 높다는 이유 등으로 녹색프로젝트로 인정됐다. 하지만 채권의 투자 대상은 재생에너지 보급 활동 등이 아닌 개발 사업 전체이다. ‘토지매입’ 등 실질적인 녹색활동과 무관한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유락시설과 쇼핑몰 건축에도 녹색채권이 쓰였다. 2021년 서울 롯데월드타워와 월드몰 건설엔 4000억 원의 녹색채권이 투입됐다. 해당 시설들은 친환경성과 에너지효율 등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재생에너지를 활용해 비슷한 다른 시설에 비해 에너지 자립도도 높다.
하지만 탄소중립의 기본 방향이 에너지와 자원 소비를 줄이는 방향인 만큼, 호텔과 쇼핑몰 등이 들어선 초고층 타워에 녹색채권이 쓰인 것은 역설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해당 건축물들은 에너지효율이 비슷한 유형의 시설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지만, 여전히 서울 내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 건축물로 꼽힌다. 해당 녹색채권도 준공이 끝나고 한참 뒤에 발행됐고 건설 과정에 발생한 잔여 지분 인수에 쓰여, 직접적인 녹색활동과 거리가 멀었다.
기후솔루션 고동현 기후금융팀장은 “국내에서 관대하고 폭 넓게 녹색을 인정해 준다”며 “지침이나 규정이 형식적이고 엉성해, 이런 기준에 녹색을 맞춘 기업들이 국제기준에 미달해 도태하는 녹색장벽이 세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33조 녹색채권 어디에 > 데이터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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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