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보는 것만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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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전 경성대 철학과 교수

왜 영화를 보러 가는지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관은 다르다. 재미도 없는데 전시회는 왜 가야 할까?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특별전’을 어슬렁거리며 필자에게 이런 의문이 생겼다. 사람들은 “교양을 쌓기 위해서”라고 응답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을 넘어서서 미술관 방문은 우리 삶 자체에 몇 가지 특별한 혜택을 준다.

첫째, 미술 전시회를 통해 감상자는 새로운 시각에 노출된다.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작가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종종 사회나 개인적 경험에 대해 독특한 견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이해 방식에 도전하여 문제를 더욱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번 전시회의 작품 중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에사이아스 보스의 ‘소박한 식사’는 대중의 일상적 삶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이다. 아내와 남편(또는 아들과 아버지)은 장식이나 눈에 띄는 사물도 없는 소박한 방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화가는 두 사람을 화면의 중앙에서 좌우로 약간 벗어나게 배치하여 방 전체의 단순성에 감상자가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식사는 중산층 가정에서 매일 여러 번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이지만, 작가는 이것을 포착하여 가족의 식사 같은 일상적 사건이 어떤 정치적, 종교적 사건만큼 위대한 일이라는 점을 감상자에게 알려 준다. 세상 사람은 대개 소중한 진실을 잊고 살아간다. 그 망각된 진실은 특정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데, 그것을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발현 사건(Ereignis)’이라고 부른다. 예술가는 발현 사건을 창조하여 감상자에게 삶의 진실을 회상할 기회를 준다.

미술품 감상은 우리 삶의 특별한 혜택

아름다움과 세상에 대해 사색할 기회

아는 만큼 보인다? 보는 만큼 알게 돼!

둘째, 작품을 보며 감상자는 자기 자신의 주변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발견할 수 있다. ‘미(美)’란 무엇인지는 오랜 세월 동안 철학적 토론의 주제였다. 플라톤은 미가 인간의 관념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라고 보았고, 근대 영국의 철학자들은 미가 개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특징이라고 여겼으며, 칸트는 대상이 어떤 목적에 기여한다는 판단에서 미의 기초를 찾았다. 미의 본질에 관한 철학자의 주장이 어떠하든, 우리가 대상에서 미를 경험하는 것은 사실이다.

뤼시앵 피사로의 ‘아침 햇살’은 평범한 시골 풍경을 묘사한다. 화면에는 그냥 나무와 들판, 농가가 있을 뿐 관광객이 찾아올 만한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런데 작품은 세상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른 아침의 풍경을 구성하여 평범한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상자가 깨닫도록 만들어 준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농가를 구경하러 비행기를 타고 오랜 시간 날아가지만,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도 아름다운 것들은 많다. 이번 전시회는 다수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는데, 20세기 현대미술 작품을 모아 놓은 방에 ‘모든 것에는 아름다움이 있으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는 문장이 벽에 걸려 있다. 예술 작품은 우리가 놓치고 있던 주변 세상의 미를 발견할 기회를 준다.

셋째, 감상자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넓은 세상을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작품은 특정 시대와 집단의 문화, 가치, 역사를 반영한다. 그래서 전시회는 예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다른 문화, 역사적 사건, 사회적 문제를 감상자가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교육적 현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예술의 전시회는 15세기의 종교적, 정치적, 과학적 발전에 대한 통찰력을 감상자에게 제공하며, 현대미술 전시회는 가치의 혼란, 불평등, 기후 변화와 같은 현대 사회 문제를 탐구하는 자료가 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품도 전시되었다. 이르마 스턴의 ‘바후투 연주자들’은 아프리카의 문화 이해를 확대한다. 음악은 많은 아프리카 문화에서 작곡자나 연주자의 개인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연주를 통해 공동체가 집단적 경험을 형성하고 공유한다. 작품은 바후투를 부는 실제의 연주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 연주자들을 빽빽하게 화면에 가득 채워 음악을 만드는 행위가 아프리카 문화에서 차지하는 풍부한 역할을 감상자에게 알려 준다. 작품이 작가의 개인적 창의성뿐 아니라 시대와 사회를 드러낸다는 관점에서, 미술 전시는 세계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필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의 지식은 없으며, 설사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면서 획득하게 된다. 그냥 전시장에 가서 작품을 보면 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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