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세상은 안전했을까
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날마다 새로운 뉴스들이 세상을 덮는다. 유독 흉악한 것들이 적지 않고, 성과 관련한 범죄들은 특히 그렇다. 성범죄가, 딥페이크 포르노가 적발될 때마다 새삼 놀라고, 세상이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일이 벌어지기 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과연 무해했을까.
성 문제와 관련한 교육은 굳이 필요하지 않고, 가정에서 알아서들 가르칠 일이라는 생각들이 있다. 성을 꺼내어 말하는 일은 공연한 짓이고, 가만히 놔두면 원래 거기에 깔린 것이 잘 작동할 거라고, 특히 성 문제만큼은 그럴 것이라는 낙관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근거가 취약한 낙관이 세상 일 앞에 무너지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흉한 일을 마주했을 때 그 낙관의 내용이 뭐였는지를 캐묻는 일이 그래서 중요해진다.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그래피를 문제삼은 이유는, 그걸 보는 모든 사람들의 분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포르노의 형식이 실제 성범죄의 형식과 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교환 가능한 성적 대상으로 보는 습관이 그것이다. 무릇 사람과의 섹스는 아무나가 아니라 오직 그 사람과의 관계여야 하고, 설령 하룻밤 관계여도 눈앞의 상대가 나만큼 중한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섹스가 뉘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닌 협상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거기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의 얼굴과 몸이 자유로이 바뀌어도 상관없는 섹스를 추구하다보면, 실제 사람을 내 성욕을 위해 교환 가능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일에 손쉽게 이끌린다. 딥페이크와 포르노를 관통하는 성욕의 원리가 거기에 있다. 더욱이 인간의 개별성이 거세된 성욕을 쉬이 추구하려면 상대뿐 아니라 나도 얼마간 인간이 아닌 편이 이롭고, 그것이 곧 남자다움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남을 편하게 사람 취급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거추장스런 사람임을 포기하는 일은 많은 폭력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희미한 낙관에 기대 혹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세상 사람들이 여태 성을 그럭저럭 잘 실천해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이제껏 세상이 과연 성을 잘 실천해왔는가는 따져볼 문제지만, 얼마간 실제로 그러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주어진 성 규범을 철썩같이 믿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내심 믿지 않고 살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이 말하는 남성성·여성성에 편승하기보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집중하여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새로 빚어나가고, 상대와 진지한 마음으로 협상에 임해온 양식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지금껏 이리 버텨올 수 있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어째서 세상은 새삼 이토록 위험해졌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세상은 여태껏 누군가에게 용케 안전할 수 있었는지로. 세상은 특정한 누구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안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