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평균 4시간씩 4년을 돌봐도 끝이 안 보이는 굴레 [꿈을 저당 잡힌 '영 케어러']
상 - 삶에 짓눌린 아이들
2명 중 한 명 꼴로 홀어머니 봉양
29%는 간병에다 가족 생계까지
진학 등 개인 꿈 꿀 시간 언감생심
악조건 탓에 사회적 문제 발생도
부산 동래구에 거주하는 A(15) 양은 3년째 하루 평균 3~4시간을 집안일을 돌보는 데 쓴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와 놀고 싶을 때가 많지만 집에 있는 엄마가 항상 마음에 걸린다. 거동이 불편한 엄마의 식사와 약을 제때 챙기려면 곧장 집으로 와야 한다. A 양은 집에 돌아오면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청소기로 집안 곳곳을 정리한다. 장을 보고 식사 준비까지 하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난다.
A 양은 엄마와 함께 사는 한부모가정의 청소년이다. A 양은 평소 건강문제를 겪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하는 등 실질적인 가장이다. A 양은 “엄마가 아프시니 어쩔 수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리사가 꿈이라고 했다. A 양 엄마는 수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돼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근로소득도 없다. 엄마를 돌봐야 하는 A 양은 결석이 잦아졌고, 학교 출석일수가 모자라 원하던 조리 특성화 고등학교 진학도 접었다.
■1020 영 케어러, 부산에만 2만 명
부산에는 A 양처럼 학업 외에도 가족 간병과 돌봄, 집안 살림을 챙겨야 하는 청소년이 최소 2만 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된다. 영 케어러는 일반적으로 해당 연령의 약 5~8% 정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 지난 11월 말 기준 부산시 청소년(9~24세) 총 인구수는 45만 3789명인데, 이 수치를 적용하면 부산에 거주 중인 청소년 영 케어러는 적게는 2만 2689명에서 많게는 3만 6303명으로 추산된다.
10대 영 케어러들 삶이 특히 고달프다. 상당수가 학업이나 진학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나 취업 전선에 내몰린다. 성인이 돼서도 고통은 이어진다. 전문가들은 “청소년 시기를 불안정하게 보내면 결국 성인이 돼서도 실업을 경험하거나 불안정한 저소득 일자리에 종사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보건복지부가 시행한 ‘가족돌봄청년실태’ 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영 케어러들은 평균 하루 4시간, 주 32.8시간을 돌봄에 할애한다. 평균 돌봄 연수는 4년(46개월)에 이른다.
지난달 발표된 사회보장정보원의 ‘가족 돌봄 청년 기초 연구’에선 영 케어러 2명 중 1명(52%) 꼴로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약 29%는 부모가 모두 있지만 이들의 간병과 가족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부모 자녀 세대’ 영 케어러다. 11%는 자녀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경우다. 손자·손녀가 할아버지·할머니를 돌보는 ‘조손 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1.1%였다.
■“꿈 저당 잡혀”… 사회적 대비 필요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꿈을 저당 잡힌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영 케어러 가정방문과 상담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사회복지사는 “이들을 지켜보다 보면 현실과 미래 사이에서 좌절을 겪고 이겨내기도 하면서 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일보〉 취재진이 만난 영 케어러들은 일상에서 ‘자기 시간’이 없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A 양 역시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자 “다른 친구들과 같은 환경이었다면 결석할 일도 없을 테고, 학원도 다니면 원하던 학교를 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영 케어러 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2021년 대구에서 일어난 ‘간병 살인’ 등 극단적 사회 문제로 번지지 않으려면 선제적으로 영 케어러를 발굴, 접촉해 관련 지원정책 연계 등 이들의 짐을 덜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입법조사처 허민숙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관은 “아동·청소년들이 가사노동과 돌봄 부담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다면, 이는 가족에 대한 애정과 보살핌을 넘어서는 일”이라며 “이는 교육, 교우 관계, 발달 등 개인의 삶에서 마땅히 누려야할 생애 과업상 중요한 경험을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고 향후 다양한 문제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연구원 이봉조 연구위원은 “최근 통계청 조사 결과 영 케어러의 우울증, 미취업자 비율 등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보였다”며 “영 케어러를 둘러싼 다양한 각종 통계 지표에 있어 경각심을 갖고, 미래 세대가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을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