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어머니와 사단(四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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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성 수필가

인간 본연의 심성 사단(四端)
리(理)에서 발현하는 것이지만
칠정(七情)은 어디서 발현되나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논쟁
그게 삶에 어떤 의미 부여했나

조선 중기, 50세가 넘은 노학자 퇴계(退溪)와 갓 출사한 30대의 기대승은,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 본연의 심성인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현하는 것이지만, 감정적 요소인 칠정(七情)은 리(理)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아니면 기(氣)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상(現象)이 발현(發現)된 근본에 관한 시비였습니다. 어떻게 사단에 따라 행동하고 칠정을 다스릴까 하는, 실천적 문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그 발현처가 하늘이냐 땅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리에서 기로 발현된 현상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논쟁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현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담론이었을 것입니다. 대체, 현상의 발현처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이런 논쟁에 열중하였을까요? 고담준론을 즐기던 선비들은 이를 대단한 논쟁으로 여기어 토론했고, 학당에는 지금에도 회자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나중에 정치적 파당(派黨)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뿐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하교하고 무심히 집에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다시 뛰쳐나갔습니다. 우리 집 대청에 어떤 문둥이가 앉아, 상에 차려진 밥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문둥이는 사람을 잡아서 간을 빼먹는다는 무서운 소문도 있었고, 그 추한 모습 때문에 집에 들이기를 모두 꺼렸습니다. 그런데 그 문둥이가 우리집 대청에 앉아 멀쩡히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집안을 살펴보니, 어머니는 이쪽 마루 끝에 앉아 식사 중인 문둥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나병환자가 집을 나갔겠다고 짐작되는 무렵에 집으로 들어갔더니, 어머니는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재로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그릇들이 어머니가 나병환자에게 차려준 밥상에 올랐던 그릇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문둥이를 왜 집에 들이어 밥을 차려주느냐?”며 화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는 어머니는 그릇 닦던 손을 내려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다! 배고픈 사람이 찾아왔는데 어찌 그냥 내쫓나? 그 사람인들 그런 병에 걸리고 싶어 걸렸겠나, 어쩌다 운수가 나빠 그런 것이지….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사람 업신여기면 못쓴다.” 어머니 말씀이 하도 무겁게 들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밥을 빌려 오는 사람들, 우리가 거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축담 아래 서서 밥을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꼭 그들의 그릇을 채워 보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밥이 없어 굶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허기가 진 사람들에게는 밥 한 그릇이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야 그날 어머니가 그 불결한 문둥병 환자를 대청마루에 앉혀 놓고 밥상을 차려준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아 허기가 진 문둥이가 찾아오자, 어머니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청으로 불러올려 밥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문둥병 환자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정이, 유일한 필요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 선비들은 높은 관을 쓰고 사단칠정을 논쟁했지만, 사단(四端)이 대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시는 어머니는, 그 사단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연민을 가슴에 안고 사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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