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9개월이 지났다
최혜규 플랫폼콘텐츠부 차장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발표했다. 9개월이 지났다.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았다. 교수는 개원가로 떠났다. 의대생은 수업을 거부했다. 그 사이 내년도 의대생을 뽑는 수능은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재수생에 직장인들까지 의대 입시에 몰린다고 한다. 정작 의사국가고시 응시도 줄어 내년에 의사 배출은 급감할 전망이다. 의사를 늘리자고 시작했는데 의사는 없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만 미어터진다.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를 살리겠다는 명분도 현장에서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부산 지역 수련 대학병원 전체의 하반기 전공의 지원자는 다섯 손가락도 채우지 못했다. 연간 2만 건이 넘게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에는 전국에 10여 명의 전공의만 남았다. 지난 9월에는 경남 거제의 50대 급성 복막염 환자가 수술실과 응급실 병원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가 7시간 만에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숨진 사건이 있었다.
중증 환자와 가족들의 두려움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의 사망률을 분석해 초과 사망자가 1700여 명이라고 밝혔다. 전공의 이탈로 시작된 의료 공백이 방치되지 않았다면 막거나 미룰 수 있었을 죽음의 숫자다. 대부분 심부전과 쇼크, 뇌 손상이나 암 환자 등 중증 환자의 진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들이다.
의정 갈등이 봉합되더라도 그 여파는 사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다. 울산의대 박인숙 명예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촉발한 의료재앙 개념도’를 공개했다. 전공의 이탈, 의대생 동맹휴학으로 시작된 도미노가 의사 교육과 의료의 질을 저하시키고, 더 나아가 국가재정의 악화와 이공계 몰락, 지방 붕괴 가속화 등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기우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사라는 직역은 법정단체 지도부의 막말과 환자를 볼모 삼는 집단 이기주의로 민낯을 보였다. 그러나 책임을 따지자면 정부 몫이 더 무겁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 열정과 균형 감각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지금의 혼란은 역대급 균형 감각이 필요한 난제를 열정만 앞세워 송판 격파하듯 밀어붙인 결과다. 정부는 독단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1일 정부와 의료계는 의대 증원 사태 이후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전공의 없이 출발한 여·의·정 협의체는 연내 의미 있는 결과를 내고 국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공의들은 여전히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수능 다음 날인 15일에는 제적 위기에 놓인 전국 의대생들이 처음으로 총회를 갖는다.
의료 개혁은 정부의 핵심 정책인 4대 개혁 중에서도 1번이다. 시급한 과제인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문제라서다. 처음에는 국민적 지지도 받았다. 9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과거 정권이 선거 때문에 하지 못한 일”, “어떤 저항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거듭 외치는 ‘민생’이나 ‘개혁’의 메아리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