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의 메타경제] 바다로부터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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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부산이 잃어버린 기회들 되돌아볼 때
아파트로 둘러싸인 해안 황량한 풍경
지켜야 할 문화 자산·콘텐츠 고민해야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부산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모여 색다른 연구를 시도하였던 적이 있다. ‘부산이 잃어버린 10개의 기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1년여 동안 토론을 하였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출판이나 학술지 투고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기에, 결론을 내지는 않았지만 나름 부산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 ‘왜 부산은 깡통시장을 세계적 명소로 키우는데 실패했을까’라는 주제도 들어가 있었다. 물론 우리 경제가 발전하여 공산품의 자급이 이루어지면서 밀수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무역자유화의 진전과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의 감소로 깡통시장에 들어오는 밀수품의 공급이 줄어든 탓도 있다.

그러나 명소는 가끔 이러한 경제적 논리와 관계없이 만들어진다. 밀수의 시대가 가더라도 세계의 깡통을 모두 모아 놓는 세계 유일의 시장으로 변신을 시도했다면 과거의 명성을 이어 가면서 지금쯤 유명한 관광 명소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엉뚱한 기획이 혁신의 원동력일 수도 있다.

깡통시장을 채웠던 밀수상품 가운데 많은 것들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 5.16 군사정권 등장 이후 잠시 된서리를 맞기까지 우리나라 밀수의 중심은 대마도와 연계된 남해안이었는데, 특히 부산은 핵심적 밀수의 거점이었다. 이 시기 밀수를 주도했던 것은 이른바 특공대로 불렸던 작은 발동선으로 대마도에 가서 상품을 몰래 들여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대마도의 이즈하라를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다. 평지가 거의 없는 대마도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 시내도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저녁을 먹고 나가 본 이즈하라의 도심은 어둡기까지 하였다. 그 어둠 속에서 특공대 밀수가 성행했을 때의 이즈하라항을 떠올려 보았다.

밀수의 전성기 시설, 수백 척의 특공대 배들이 이즈하라항에 일상처럼 드나들었고, 그러다 보니 이즈하라항은 밤에도 대낮같이 밝았다. 우리 정부가 대마도 밀수의 단속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의 태도는 밀수를 무역의 한 형태로 보면서 방관하였기에 대마도에서 밀수는 근절되지 않았다.

한때 한일 간의 밀수 거점이었던 이즈하라를 방문하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손에는 밀수품이 아닌 면세품들이 들려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방적인 방문이 대세이긴 하지만 관광과 쇼핑이 부산과 대마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역할 하면서 과거 밀수의 기억은 거의 잊힌 듯하였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방문했던 대마도의 인상은 좀 밋밋하였다.

그런 한편 부산에서 출항하고 다시 부산항으로 들어오면서 받은 인상이 오히려 좀 더 강렬하였다. 부산항대교를 타거나 영도에서 북항을 바라볼 기회는 있었지만 바다에서 배를 타고 부산항을 들여다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항상 육지에서 바다를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느낌은 아주 달랐다.

바다에서 부산항을 들여다보는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 관한 기록들은 개항기 부산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의 여행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을 경유하여 부산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부산의 모습은 ‘황량함’이었다. 용두산을 제외한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고, 그래서 부산은 바위투성이의 검은빛으로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바다에서 바라보는 북항에서는 오페라하우스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많은 곳이 아직은 대부분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항재개발지에 인접한 곳에 우뚝 솟은 주거 건축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아 갔다. 약간 더 떨어진 곳에도 높은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앞으로 북항에 들어설 랜드마크 건축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가려줄지는 몰라도, 주변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높은 키의 건물들은 북항의 풍치를 갉아먹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서 부산의 문화와 예술 행사가 잇따르고 각종 세미나도 열리고 있다. 원도심이 가지고 있는 문화 자산을 살려야 하고 부산의 정체성을 담은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세미나에서 강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든 공공의 공간을 여전히 아파트가 둘러싸는 익숙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이를 핑계로 산복도로의 나지막한 집들도 조망권을 주장하며 높이를 올려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바다에서 보는 미래 부산항의 모습이, 높은 시멘트 건물로 포위되면서, 또 다른 황량함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개항 150년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우리는 아직 바다로부터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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