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피란 세대 유산' 부산 빈집, 이젠 비움의 공간으로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대성 기획취재부 차장

얼마 전 어릴 적 살던 곳으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유년 시절은 물론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었던 만큼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옛 추억이 아련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도로를 두고 양옆엔 지은 지 50년은 족히 된 듯한 4~5층짜리 집들이 건물 사이에 조금의 공간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구획 정리가 된 좁은 필지마다 들어선 건물은 하나같이 길쭉한 사각형이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빈집들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집 앞에는 노인들이 나와 자리를 펴고 한적함을 달랬다.

기자가 살았던 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정책 이주 지역이었다. 마을을 떠났던 20여 년 전과 비교해보면, 놀이터가 사라지고 도로가 생긴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새 도시철도가 뚫렸고,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아파트 건립 사업이 추진되다 사업성 등을 이유로 중단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그곳의 시간은 멈췄다.

최근 부산의 빈집 문제를 기획 취재해 보도했다. 이 같은 개인적 경험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원도심과 정책 이주지를 중심으로 심각한 빈집 문제에 직면한 부산의 현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빈집 문제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빈집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정부와 부산시가 이미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제 겨우 인구 소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인 빈집 문제에 대해선 빈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허가 빈집은 제외하는 등 제대로 된 통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태 파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보니 빈집 문제 대응에 필요한 예산도, 대책도 턱없이 부족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부산의 일선 지자체들은 급증하는 빈집에 속수무책이다.

부산의 빈집 문제는 우리 근현대사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전쟁과 피란 등 굴곡진 역사를 짊어진 부산은 구릉지와 산복도로 주변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구가 몰려들며 주거지가 형성됐다. 이는 현재 인구 소멸에 따라 빈집 문제로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부산은 이러한 특수성으로 전국에서 빈집 문제가 가장 심각한 대도시가 됐다. 정부가 부산을 ‘빈집 특별재난구역’으로 지정하거나, 관련 특별법을 만들어 대응해야 한다는 한 전문가의 메시지에 정부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선제 대응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해서 마냥 두고 볼 순 없는 일이다. 급증하는 빈집이 ‘쓰나미급’ 폐해를 가져오며 부산의 도시 성장에 아킬레스건이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빈집 문제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짧은 기간 무계획적이고 급속하게 응축됐던 역사의 공간을 이제 하나둘 비워 나가는 것이다. 인구 소멸로 더 이상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없다면, 지형이 가파르고 기반 시설이 열악해 사업성이 부족하거나 개발이 힘든 곳이라면, 빈집을 공원으로, 녹지로, 마당으로, 때론 길로 비워 나가야 한다. 한 도시재생 전문가가 오랜 시간과 경험에서 얻은 답도 그랬다. “빈집을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철거해서 다양한 시설도 만들어봤지만, 결국은 누군가가 다시 들어와서 살아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