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일개 브로커가 나라 흔들 수 있는 이유
여의도 주변 '도사' 같은 명태균류 드물지 않아
복잡한 정치판, '한 방' 묘수 찾는 심리가 토양
윤 대통령 만든 건 술수 아닌 '공정' 시대정신
묘책 아닌 초심인 '공정과 상식'으로 돌아가야
명태균 씨가 공개한 김건희 여사의 ‘철없는 오빠’ 문자는 김 여사뿐만 아니라 명 씨의 ‘수준’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오빠가 당연히 윤 대통령일 것이라는 충격파를 던진 뒤 대통령실의 ‘친오빠’ 해명이 나오자 뒤늦게 ‘맞다’며 여론을 쥐락펴락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치로 높이면서 ‘나 건드리면 대통령이 다칠 것’임을 암시하는 문자를 교묘하게 골랐다. 대통령 내외가 자기 과시형 정치 브로커에게 단단히 코가 꿰인 형국이다.
국민들은 이전까지 경남 일대에서 지역 정치인들을 상대로 알음알음 활동하던 명 씨가 어떻게 대통령 내외에게 접근해 수시로 만나고, 영부인이 ‘완전 의지하는’ 관계가 됐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전부터 그를 알고 지내던 경남 지역 정치인들의 평가도 “위험한 인물” “전형적인 선수”와 “탁월한 정치적 식견” “도사 느낌”으로 갈린다. 명 씨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민주당은 바람을 일으키지 않느냐. 나는 산을 만든다. 아무리 바람이 세도 산 모양대로 간다”고 했다. 여론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선거 구도를 자유자재로 만든다는 것인데, 내로라하는 정치권 책사들도 감히 하지 못할 얘기다. 명 씨의 정치 감각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자의식 과잉에 허세가 심한 건 분명해 보인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의도 주변에서 명 씨 류의 인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정치 현상이라는 게 너무 많은 변수들과 시시각각 뒤바뀌는 상황 때문에 한 치 앞을 예측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정치학자들도 “~할 경우”라며 단서 조항을 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럴 듯한 논리와 오묘한(?) 화법으로 복잡한 정치 현상들을 ‘일도양단’ 식으로 정리하고, 누구도 확신하기 어려운 미래를 단호하게 제시하는 인물들이 있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권 인사들이 찾아 다니는 ‘용한 도사’들과 흡사해 보인다. 이런 확신론자와 회의론자가 논쟁하면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하다. 후자에 가까운 나는 그런 확신의 언어들을 잘 믿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복기해보면 맞는 얘기만큼 틀린 얘기도 많았다는 게 20년 정치권 취재의 경험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명 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김영선 전 의원은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당시 수산시장의 수족관 물을 먹는 기행 정도나 기억되는 지리멸렬한 의정 활동 끝에 이번 총선에서 ‘컷오프’ 됐다.
그러나 명 씨 같은 사람들에게 빈약한 ‘타율’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 들어맞은 ‘한 수’는 오롯이 자신의 공이고, 이를 끊임없이 확대재생해 자신의 브랜드로 포장한다. 선거 판세를 가를 묘책라는 게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대선과 같은 큰 선거에서 그런 일들은 특정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집단 사고의 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 씨가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하는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안철수 후보 단일화’는 당시 캠프 대다수의 사람들이 승리를 위한 방책이라고 봤다.
명 씨가 ‘박사’ 대접을 받은 무기는 여론조사였다. “윤석열이 홍준표보다 2% 높게 나오게 만드이소” 등 명 씨가 맞춤형 여론조사를 했다는 정황들이 공개된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 특정 이념 성향이 과표집되는 여론조사의 문제점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공표도 못 하는 비공식 여론조사로 민심을 움직인다는 것도, 수많은 다른 조사들과 상반되는 ‘튀는’ 여론조사로 ‘밴드웨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나로서는 정치 소설에나 있음직한 얘기로 들린다. ‘맞춤형 여론조사’로 할 수 있는 일은 심지와 지력이 약한 소수의 사람들을 현혹하는 정도 아닐까. 그 중 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김 여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윤 대통령의 2022년 대선 승리에서 어떤 결정적 한 방이 있었나? 오히려 이준석 대표를 내치려다 끌어안고, 안철수와의 단일화도 미루고 미루다 선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게 되자 막판에 어렵사리 성사됐다. 초반 승기를 불필요한 헛발질 끝에 ‘0.73%P’ 차이로 겨우 지킨 게 지난 대선 결과 아니었나. 윤 대통령이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다른 데 있지 않다. 2013년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기개 있는 검사의 모습, 여기에 정권의 허물을 힘으로 누르려 한 전임 정권의 비상식적인 국정 운영에 분노한 민심이 공명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어떤 예지력을 지닌 특정 인물의 묘책이 주효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윤 대통령을 최악의 지지율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은 이젠 너무 곪고 곪아 해법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껏 국민 다수의 생각과 배치됐던 주변의 현란한 묘수들과 사사로운 감정들을 걷어내면 오히려 해법이 간명해질 수 있다. 바로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로 올린 ‘공정과 상식’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