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여성의 서사, 새로운 K콘텐츠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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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노벨상, 남성 중심 문학계에 충격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저항적 글쓰기
빛나는 세계적 성취 한국 사회 성찰

여성의 체험과 감정이 갖는 보편성
강력한 성장 동력 발상의 전환 필요
미래의 가치로 인정하고 환대해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주말 동안 서점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원서로 읽겠다는 열풍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많은 이들을 들뜨게 했다.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K팝 빌보드 차트 1위로 한국의 영화, 음악이 세계적 수준임이 증명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국문학 역시 세계적 수준의 정점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한국문학의 부흥과 세계화를 꿈꾸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세계적 성취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번역 예산이나 문화예술 분야의 심각한 예산 삭감 문제가 언급되기도 한다. 모쪼록 장기적 전망으로 더 나은 변화를 기대한다.

한편 많은 언론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뒤늦게 깜짝 놀랐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기마다 해외 베팅업체에서 수상 후보로 점찍었던 시인의 집 앞에 기자들이 몰려가던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해외 언론 역시 이러한 현상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한 여성이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한국 현대문학의 대부분은 여성 소설가들에 의해 쓰이고 있지만 언론과 문학계는 나이 든 남성 작가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 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정치, 경제, 뉴스 미디어에서 차별받는 한국 현실에서 한국 여성 작가들이 보여 주는 글쓰기는 여전히 매우 가부장적이고, 때로는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고 보도했다.

여성이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그가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필연적으로 가부장제나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과 저항이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저항의 한 형태로서의 글쓰기가 가장 빛나는 세계적 성취로 인정되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 그간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거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외면당하는 골칫덩이로 취급되어 왔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페미 묻은 소설’이라며 비난하거나 책 인증을 한 여자 아이돌을 저격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러나 2022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조사한 결과 지난 5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문학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었다. 전 세계 18개 국가에 번역되었으며, 일본에서는 2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어 동아시아 여성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감대를 끌어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지점은 그동안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에게 큰 기대를 걸어왔던 모습과는 달리 한국의 언론과 문학계가 여성작가에게는 기대조차 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인 최초로 2024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또 하나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정작 국내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바리스타 전주연 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전주연 씨는 세계 최고의 월드바리스타대회에서 한국인 최초, 여성으로서는 역대 두 번째로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부산이 낳은 이 세계적 바리스타의 이름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여성 바리스타가 왜 많이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말을 고르며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명확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에서 일부 출연자들이 여성 셰프에게 ‘이모님’ ‘어머님’이라고 칭하는 장면을 보며, 어떤 인식의 한계가 여성들에게 여전히 덧씌워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와 같았다.

더 나아가 ‘젠더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문제를 왜곡 축소하는 사회나, 7개월째 여성가족부 장관을 임명하지 않고 있는 정부나, 딥페이크 성범죄의 규모가 과장되었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정치인들 역시 낡은 인식의 한계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마주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한국 여성의 목소리와 서사가 미래의 성장동력이며 강력한 K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세계는 여성의 체험과 감정이 갖는 보편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체험과 감정의 서사로부터 익숙한 과거와 결별하는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서사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무엇이 아닌, 보편적 정서와 미래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무궁무진한 여성의 역사가 깃든 우리 부산에서도 이러한 여성의 서사를 기꺼이 새로운 미래의 콘텐츠로 환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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