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대가 허진호 감독이 조성우 감독에게 대본 건네는 이유는 [부산문화 백스테이지]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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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감독 작품 영화음악 작업
1편 빼고 전부 함께한 조 감독
대본 속 ‘철학 메시지’ 잘 찾아
25일 ‘11시 음악회’ 직접 출연
OST 연주·이야기로 우정 뽐내

25일 영화의전당 '11시 영화음악콘서트'를 끝낸 후 로비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허진호(왼쪽) 감독과 조성우 영화음악 작곡가. 김은영 기자 key66@ 25일 영화의전당 '11시 영화음악콘서트'를 끝낸 후 로비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허진호(왼쪽) 감독과 조성우 영화음악 작곡가. 김은영 기자 key66@

한 달에 한 번, 매달 마지막 수요일 오전 조성우 영화음악 작곡가가 이끄는 영화의전당 ‘11시 영화음악콘서트’. 25일 ‘감독의 작품 세계를 채색하다2:허진호’편 콘서트는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했다. 멜로 영화의 대가 허진호 감독이 출연했다. 평소 70분이면 끝이 나던 ‘11시 영화음악콘서트’가 이날은 허 감독의 솔직담백 이야기가 더해져 무려 110분간이나 진행돼 커튼콜도 제대로 못 하고 허겁지겁 끝내야 했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영화음악 못지않게 그 음악이 스며든 작품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날 라이브로 연주된 작품은 모두 11곡. 허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을 포괄했다. 허 감독의 장편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부터 내달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에 이어 정식 개봉을 앞둔 ‘보통의 가족’(2024)까지 단 1편을 빼고 모든 작품을 조 음악감독이 함께했다.

1편(‘호우시절’, 2009)은 왜 빠졌을까? “(조 감독이)너무 바쁠 때였는데 안 한다고 해서 기분 나빴어요(웃음).”(허진호) “안 한 게 아니라 저한테 안 맡겼어요. 제가 너무 바쁠 때였거든요.”(조성우) 그렇게 빠진 1편을 제외하고는 허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 ‘인간실격’(2021)을 포함해 장편 9편은 함께했다.

“사실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단편 ‘고철을 위하여’(1993)가 조 감독과는 첫 작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의기투합한 거죠, 작곡료로 5만 원인가 줬어요. 미디(MIDI)라고 하나요? 당시는 필름 작업이어서 음악 싱크(사운드를 그림과 일치시켜 배치하는 작업) 맞추는 게 쉽지 않은데 정말 기가 막히게 했어요. 다들, 이거 누가 작업한 거냐고 물었으니까요.”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셈이다.

1963년생 조·허 감독은 연세대 철학과 동기이다. 허 감독은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박광수 감독 연출부를 거쳐 감독 데뷔했다. 허 감독이 첫 장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들 당시를 회고하면서 들려준 말이다.

“당시 오승욱 감독이랑 각본 작업을 했었는데, 어느 고깃집에서 조 감독에게 대본을 보여주게 됐어요. 조 감독이 철학박사잖아요. 대본을 읽더니 ‘8월의 크리스마스’는 되게 철학적인 이야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영화가 갖는 철학적인 의미와 기준을 짚어주는데 놀라웠어요. 그 후로는 항상 대본이 나오면 맨 먼저 조 감독에 보여줬어요. 조 감독이 철학적 텍스트를 짚어주면 그게 나중엔 제 것이 되는 거죠(웃음).”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와 우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첫 드라마 연출작이었던 ‘인간실격’은 영화 제작과는 많이 다른 작업 환경으로 어려움이 컸다고 토로했다. “16부작인데 대본도 다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결론도 모르고 찍기 시작했어요. 영화보다 훨씬 빨리 찍어야 한다는 게 가장 달랐습니다. 그때 느낀 건, 드라마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감독이 구현하는구나 싶었습니다.”

허 감독의 세 번째 작품 ‘외출’(2005)은 또 다른 색깔의 사랑을 느끼게 한 영화였다. 주연배우였던 배용준이 개인 화보를 낸 직후에 출연한 영화여서 캐릭터에 맞춰 근육을 뺄 시간이 없어서 극 중 직업을 다른 걸로 바꿔야 하나 고민했었다는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요즘 같으면 근육질의 남자 배우가 많아서 관객도 관용적인 편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진 않았어요. 스크린에서 최대한 신체가 드러나는 걸 줄이고 싶었지만 그게 안 돼 노출했는데 ‘욘사마 인기’에 기대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외출’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흥행하긴 했습니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 중에 어떤 게 가장 좋으냐는 질문도 나왔다. 그런데 허 감독은 뜻밖의 대답을 들려줬다. “‘봄날은 간다’(2001)는 음악이 정말 좋았고, 국내 관객에겐 좀 외면받았지만 ‘외출’을 꼽을까 싶기도 하다가 ‘행복’(2007)이 마음에 다가가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영화감독이 자기 영화를 잘 안 봅니다. 평생 한두 번 정도랄까요. 감히 제 영화를 다시 볼 용기가 없는데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허 감독과 조 감독이 오랜 작업을 이어 가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가끔 술을 한잔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영화가 보고 싶다는. 그런데 영화는 쉽게 볼 수 없으니 유튜브 같은 데서 짧은 영상을 찾아보게 되는데 그때 나오는 장면에 음악이 딱 입혀져 있거든요. 그때 ‘아! 내가 연출한 한 편의 영화를 이렇게 기억하는구나. 어떻게 보면 음악이 훨씬 더 많은 생각과 깊이를 주는구나’ 싶어서 저는 항상 조 감독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영화음악 감독을 향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조 감독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내달 개봉하는 새 영화 ‘보통의 가족’을 두고 “허 감독의 새로운 시작이 되는 영화일 것”이라고 칭찬했다.

이 외에도 허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하는 명대사 “라면 먹을래요?”가 “라면 먹고 갈래요?”로 바뀌게 된 경위라든지, 국내 첫 사극 연출에 도전한 ‘덕혜옹주’(2016)를 만든 계기, 단편 영화 ‘두 개의 빛: 릴루미노’(2017) 제작 배경 등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콘서트의 마지막은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 두 남자의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 호흡을 보여준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연주였다. 조·허 감독의 두 사람의 우정도 별처럼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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