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그라이너의 눈물과 국가
황석하 스포츠부 기자
지난 11일(현지시간) 폐막된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미국은 16년 만에 중국에 1위를 자리를 뺏길 뻔 했다. 올림픽 마지막 날 열린 농구 여자부 결승에서 미국이 프랑스를 67-66, 단 1점 차로 금메달을 따면서 종합 1위를 지켰다. 성조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고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브리트니 그라이너였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촉발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의 소용돌이 속에 그라이너가 보여준 태도는 올림픽 시상대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그라이너는 경기 전 미국 국가가 울릴 때 항의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그는 2020년 7월 지역언론 애리조나 리퍼블릭과의 인터뷰에서도 “솔직히 우리 시즌 동안 국가를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라이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기자는 그라이너의 경기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지난해 8월 10일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피닉스 머큐리와 코네티컷 선의 대결을 관람했다. 홈팀 머큐리의 응원이 메아리친 피닉스 풋프린트 센터의 열기는 피닉스의 폭염보다 더 뜨거웠다. 머큐리 공격의 핵은 역시 2m 6㎝의 장신 센터 그라이너였다. 그는 이날 21득점을 기록하고 리바운드 10개를 잡아냈다. 경기 내내 펄펄 뛴 그라이너 덕분에 머큐리는 선을 90-84로 물리쳤다.
그라이너의 활약이 특별히 돋보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10개월 동안 러시아에서 구금된 뒤 2022년 12월에 풀려나 친정 머큐리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라이너는 오프시즌 중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 리그서 활동하다 대마초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의료용 대마초를 실수로 짐에 넣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수개월간 그라이너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벌였다. 결국 양국은 미국에 수감돼 있던 러시아 출신 ‘죽음의 무기상’ 빅토르 부트와 그라이너를 맞바꾸는 것으로 합의했다. 자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부트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며 2029년에 미국 감옥에서 석방될 예정이었다.
그라이너의 귀국 관련 백악관에서 이뤄진 백브리핑 때 한 기자는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부트의 악명을 고려했을 때, 다른 정부들이 ‘우리도 미국인 중 한 명을 잡으면, 우리 쪽의 더 큰 인물을 되찾을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어떻게 방지할 수 있나요?”
미국 관료는 기자에게 되물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브리트니 그라이너와 같은 사람이 허위 절차를 거쳐서, 러시아 교도소의 끔찍한 상황 속에 9년을 보내도록 강요받는 것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을까요?”
미국 여자 농구팀의 올림픽 시상식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그라이너의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는 칼럼을 게재했다. 칼럼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오용하는 성조기를 그의 어깨에도 걸칠 수 있다. 흑인을 재산처럼 소유했던 변호사가 쓴 미국 국가는 그라이너의 노래이기도 하다”고 썼다. 그라이너의 눈물이 정말 모든 것을 말해줬다. 정부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제 역할을 다했을 때 국기와 국가를 외면했던 사람의 마음마저도 움직일 수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라이너는 올림픽 금메달로 미국에 보답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