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어떤 목소리를 기억할까요
김효정 젠더데스크
우리 사회 진일보 계기 인물
'올해의 보이스'상 시상 열려
'돌려차기'사건 피해자 수상
'피해자다움' 깨고 적극 활동
기후 위기·디지털성범죄 피해
연대 지지 목소리 들어주길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씨네큐브광화문에선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이날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19년부터 이어온 ‘올해의 보이스’ 시상식을 연 것이다. ‘올해의 보이스’상이란 우리 사회의 진일보에 영감을 준 개인 또는 단체에 감사와 연대의 마음으로 수여하는 상으로, 최근 1년간 여성 이슈와 현안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해 상금과 상패를 수여한다.
올해 수상자는 일명 ‘부산 돌려차기’라고 불리는 사건의 피해생존자 김진주 작가, 기후 위기 시대의 대안 농업 방식인 ‘퍼머컬처’ 농법을 바탕으로 기후 위기 대응 활동을 해온 ‘소란’의 유희정 활동가, 2019년 ‘N번방’ 사건 관련 가해자가 춘천지법에서 재판받은 일을 계기로 디지털성폭력 재판 방청과 모니터링 등에 힘써 온 춘천여성민우회이다.
김진주 작가는 사건 조사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와 외부 활동으로 젠더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피해자다움)을 깨고 인식 변화에 앞장서 왔다. 가해자의 계속되는 협박과 2차 가해 속에도 활동을 이어왔고, 자신의 분투를 진솔하게 다룬 저서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를 펴내 주목받았다.
김 작가는 소감문을 통해 “이런 뜻깊은 상을 받을 줄 몰랐다. 당시 나는 절박했다. 매시 매초 사건은 다르게 흘러갔고 하루하루 가늠할 수 없었다. 재판 이후 이 시간이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주어질 생각을 하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영원히 피해자를 표현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사실 김 작가는 부산일보 취재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김 작가의 사건은 부산일보의 단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일회성 사건 보도를 넘어 지속적인 보도를 통해 수사부터 재판까지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가 ‘제3자’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현 사법 시스템의 부실함을 낱낱이 보여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산시는 범죄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 지원 시스템을 마련했고, 정부는 범죄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권도 강화했다.
‘돌려차기’사건과 김 작가는 부산일보 젠더데스크인 나와도 인연이 있다. 젠더데스크로서 성범죄 사건 보도는 유난히 꼼꼼하게 모니터링을 하게 된다. 단어 하나에도, 표현 한 줄에도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조심하게 된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묘사,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제목은 철저하게 배제하려고 한다. 기자협회 성범죄사건 기사 작성 가이드라인에도 이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돌려차기’라는 단어 사용을 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자칫 사건 자체를 희화화시키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옷매무새를 비롯해 발견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묘사 역시 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피해자에게 괴로웠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건 2차 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해주길 부탁했다고 전해 들었다. 단순 폭행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범죄를 노리고 접근했고 폭행으로 피해자는 정신을 잃었지만, 자신이 입었던 옷의 특징과 상황으로 볼 때 성범죄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했다.
‘돌려차기’사건은 젠더데스크로서 성범죄 기사 보도에서 하지 말라고 했던 걸 예외로 허용한 기사였다. 그만큼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는 뜻이다.
김진주라는 필명은 가해자의 폭행으로 인해 마비됐던 오른쪽 다리의 감각이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6월 4일을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6월의 탄생석이 진주이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책 제목에 대해 “죽지 않았음에도 ‘죽는 것이 다행인가, 아니면 죽었어야 마땅했나’ 이런 고민을 했던 걸 담아낸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올해의 보이스 상의 또 다른 주인공, 유희정 활동가는 서울 은평구에서 농부들과 함께 마을공동체를 운영하며 화학비료를 쓰거나 땅을 갈아엎지 않고 탄소를 땅에 가두는 유기 순환 농사를 짓고 있다. 유 활동가는 수상 소감에서 “40일 가까이 무더위가 지속되고 기후 위기가 가속되며 이전엔 없던 일들을 밭에서 만나게 된다. 이번 수상은 자연에서 만나는 일들을 더 많은 분들께 이야기하란 뜻 같다”고 했다.
춘천여성민우회는 활동가들이 36건의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을 함께하며 피해자와 연대하고 가해자들에게 정당한 처벌이 내려지는지 감시해 왔다. 이경순 춘천여성민우회 대표는 “디지털성범죄는 피해자의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파괴하는 범죄다. 가해자의 목소리만 높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검사나 국선 변호를 통해 약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여성이 죽어야만 겨우 귀를 기울일 정도”라고 꼬집었다.
살려달라는 성범죄 피해자의 목소리, 기후 환경 변화로 신음하는 지구의 목소리에 우리는 좀 더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게 곧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길이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