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영화판 뒤흔드는 AI 영화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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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성장 엔진인가, 예술의 또 다른 퇴행인가

생성형 AI 기술 진보 힘입어
누구나 영화 만드는 시대 임박
영화 창작의 ‘민주화’ 기대 속
질적 수준 하향 평준화 우려
저작권 문제도 큰 숙제로 부상
부산서 국내 첫 국제AI영화제
영화의전당 연말 개최 주목
영화도시 ‘선도적 역할’ 기대

올해 두바이 국제AI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원 모어 펌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할머니들은 어디로 떠난 걸까?’, 지난해 국내 최초로 저작권을 인정받은 AI 영화 ‘AI 수로부인’, 주연 배우 톰 행크스의 젊은 모습을 AI 기술로 구현한 미국 영화 ‘히어’(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부산일보DB 올해 두바이 국제AI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원 모어 펌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할머니들은 어디로 떠난 걸까?’, 지난해 국내 최초로 저작권을 인정받은 AI 영화 ‘AI 수로부인’, 주연 배우 톰 행크스의 젊은 모습을 AI 기술로 구현한 미국 영화 ‘히어’(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부산일보DB

영화계가 대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다. 파란의 주인공은 인공지능(AI)이다. 정확히 말하면 AI가 만드는 영화. 카메라나 배우는 필요 없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영상, 음악, 후반 작업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이 가능해졌다. 생성형 AI 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AI가 ‘영화 혁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창작의 민주화’를 기대하는 긍정적 입장이 있는 반면, 예술의 또 다른 퇴행일 뿐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AI 영화 대세론, 어떻게 봐야 하나.

■ AI의 기술적 진보

‘오펜하이머 모멘트.’ 미국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이 지난해 영화 ‘오펜하이머’를 선보이면서 언급한 이 말은 AI가 촉발한 영화판의 지각변동을 적확하게 상징한다. 원자폭탄 같은 새로운 기술의 폭발적 위력에다 애초 의도치 않은 파장의 가능성까지 내포한 순간. 이런 뜻의 오펜하이머 모멘트에는 AI가 원자폭탄에 이어 인류에게 또 하나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리라는 경고와 우려가 담겨 있다.

AI의 기술적 진보는 가위 폭발적이다. 최근 6개월 사이 AI 프로그램의 개발 속도는 쫓아가기 힘들 정도다. 획기적인 이정표는 지난 2월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공개한 생성형 AI ‘소라’다. 문장으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면 최대 1분 길이의 고품질 동영상을 만들어 주는데 이 영상을 편집해 3~4분 길이의 영상은 물론 2~3시간짜리 영화, 연속 드라마도 제작 가능하다. 구글도 영상 생성형 AI 경쟁에 가세했다. 지난 5월 공개한 ‘베오’는 영상 생성에다 편집 기능까지 제공한다. 미국 스타트업 런웨이가 6월 출시한 ‘젠-2’와 최신 버전 ‘젠-3 알파’는 업그레이드된 AI 영상 제작 프로그램으로 한층 세밀한 감정 표현과 움직임을 구현해 낸다.

완성도 높은 ‘100% AI 영화’가 나오는 날, 수천억 원이 넘는 제작비 없이도 영화 제작이 가능한 날이 머지않았다. 기술 발전의 속도도 속도지만 AI 영화 수준은 감탄스럽다. 인간을 능가하는 솜씨가 신기함을 넘어 두려움마저 안길 정도다.

■ 영화판 거대한 지각변동

미국 할리우드는 영화 제작에 AI 프로그램을 활용한 지 오래다. 최근의 사례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신작 ‘히어’다. AI 디에이징(나이를 어려 보이게 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67세 배우 톰 행크스의 19세·25세 외모를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수많은 독립 영화들이 AI로 각종 실험을 하는 미국 영화계는 분위기 자체가 AI에 적극적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국가들과 도시들이 AI 영화를 주제로 다양한 포럼을 통해 AI 시대를 준비 중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도 AI 영화에 대처하느라 부심한 모습이다. 지난 5월 제77회를 맞은 칸은 ‘몰입형 작품 경쟁 부문’을 새롭게 출범시킨 바 있다. 기술 발전에 맞춰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 등으로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한 영화들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지난 2월에는 국제AI영화제가 사상 최초로 두바이에서 열렸다. 전 세계 500여 편의 AI 영화가 몰렸는데, 한국인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이 대상을 차지해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지난 7월 영화제 때 국내 처음으로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부산에서는 영화의전당이 ‘부산국제AI영화제’ 개최를 예고한 상황이다. 전적으로 AI 영화만을 다루는 영화제는 국내 최초라는 점에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올해 12월 개최에 맞춰 이달 1일부터 21일까지 AI 기술로 제작된 작품을 대상으로 공모를 진행한 바 있다. AI 영화가 우리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들이다.

■ 창작의 민주화냐 예술의 퇴보냐

AI 영화 제작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아이디어만 있으면 기술적 재능이 부족하거나 돈 없는 가난한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쉽게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영화 제작의 문턱을 낮춰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이른바 ‘창작의 민주화’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두바이 국제AI영화제 대상작인 ‘원 모어 펌킨’의 경우 3분짜리 단편 영화로 제작 기간은 단 5일에 불과했다. 배우나 성우는 물론 카메라와 녹음, 조명 등 제작 인력마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생성형 AI로 모든 장면과 음성을 만든 이 영화는 지난해 국내 처음으로 저작권을 인정받은 AI 영화 ‘AI 수로부인’을 잇는 획기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AI 영화를 진정한 예술로 보기 힘들다는 회의적인 시선도 만만찮다. 다양한 영역이 교차하는 종합예술인 영화는 무수한 참여자들의 철학과 세계관이 어우러지는 창의성의 난장 무대다.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영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는 AI 영화에서 인간의 총체적 고뇌와 노력이 스민 예술 고유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학소설 작가 테드 창의 말이다. “합성 텍스트, 합성 이미지는 예술이 되기 어렵다. 예술은 표현의 한 형태인데 인공지능은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나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하향 평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비슷한 시각이다. 기존 데이터를 활용하는 만큼 평균 이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산업 전반의 하향 평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근본적으로는 데이터의 단순한 조합과 모방에서 진정한 의미의 창작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AI 영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부상 중인 문제가 저작권이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적인 논란을 야기하는 바, 이를 해결하려면 섬세하고 정교한 법적·윤리적 기준도 필요하다. 지난해 7월 시작된 할리우드 작가들의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이를 방증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AI 학습 훈련에 무분별하게 쓰이자 거세게 반발했다. 인공지능이라는 또 다른 기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시킨다.

■ 영화도시 부산의 기회?

올해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조지 루커스 감독의 말마따나 “AI 영화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역사상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 AI 쓰나미 앞에서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의 문제’라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사유를 빌리고자 한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 기존 예술 형식과 내용을 답습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용자의 능동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베냐민의 관점은 오늘날 AI 창작 활동을 대하는 태도에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주체의 관점에서 AI의 가능성을 면밀히 탐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AI가 예술적 지평 확대와 영화산업의 변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그 속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고유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영화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영화도시 부산도 이런 관점에서 미래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국내 처음으로 열리는 부산국제AI영화제는 소중한 기회다. AI와 예술의 융합 가능성, 한국적 콘텐츠와 AI의 결합 가능성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AI라는 영화 물결 앞에서 적극적으로 어젠다를 제시하는 부산의 선도적 역할을 기대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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