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1958~ )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시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시집 〈저녁 6시〉(2007) 중에서
답답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 한 번 크게 몰아쉴 ‘숨구멍’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쉼터, 편안하고 쾌적하게 꿀잠을 잘 수 있는 곳. 그곳에선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는 것이 제격이고, ‘사람들의 눈총이야 알 바 아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하는 생각에 잠겨있을 것이다. 풍요와 자유가 보장되어 삶의 활기가 넘치는 곳!
이상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거닐며 노는 것을 ‘소요유(逍遙遊)’라 할 때, 이는 동양적 전통의 오랜 꿈이다. 시인은 이를 조금 야릇하고 소탈하게 현실적 삶의 모습에서 구현해 내고 있다. 읽고 있으면 ‘마량’에 가고 싶은 생각이 물처럼 치솟는다. ‘누이의 손거울’ 같이 아름다우면서 자유로운 마량! 그런 곳에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가면, 누구나 제 알량한 여생이 거덜 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