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피크닉과 함께 즐기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영국 이스트 서식스주 글라인드본(Glyndebourne)에서는 매년 5월 중순부터 8월까지 열리는 근사한 오페라 축제가 있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이다. 꽤 실력 있는 오페라 프로덕션과 이름 있는 오페라 가수들이 출연하는 90년 역사를 가진 오페라 축제이지만, 오늘 소개할 시그니처 문화공간은 오페라극장이 아니라 글라인드본의 영국식 정원이다.
10년 전 이 축제를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의아했던 건, 생각보다 긴 인터미션 시간이었다. 러닝타임이 긴 바그너 오페라도 아니고 2시간 남짓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었는데 막 사이 90분이라는 비교적 긴 인터미션의 존재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방문과 동시에 그 의문은 풀렸는데, 오페라 막간에 즐기는 피크닉 디너 덕분이었다.
서식스(Sussex) 지방에 꽤 넓은 영지를 가진 작곡가이자 연극 연출자인 존 크리스티는 소프라노 오드리 밀드메이와 결혼과 동시에 그들의 땅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하고 1934년 완공한다. 축제 첫해에는 모차르트 오페라 ‘코시 판 투테’와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되었는데, 꽤 큰 성공을 거둔다. 현재는 손자인 거스 크리스티가 가문의 영지에서 축제를 이어 오고 있는데 올해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을 즐기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준비한다. 드레스 코드와 피크닉이다. 여성 관객은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고, 남자들은 검은색 정장과 보타이, 파나마모자를 착용한다. 그리고 피크닉 박스에 준비해 온 갖가지 음식과 와인을 아름다운 정원 위 원하는 곳에 테이블을 펼친다. 여행객이어서 테이블과 피크닉 박스를 준비하기 쉽지 않다면, 주최 측에 사전 요청하면 된다. 본인이 원하는 자리를 지정한 뒤 오페라 1막을 마치고 돌아오면 근사한 정원에서 야외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내부가 목조로 마감된 1200석 규모의 오페라극장은 어느 좌석에서도 무대가 가까이 보이게끔 설계되었다. 그래서 1층인 스톨과 2층, 3층의 발코니도 금액에 편차가 없다. 이번 시즌은 비제 오페라 ‘카르멘’, 레하르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헨델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무대에 올랐다. 필자는 ‘유쾌한 미망인’을 지난주 관람했는데, 무대와 연출, 연주자 기량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각양각색의 축제가 펼쳐진다. 축제의 홍수라고 할 만큼 유사한 축제가 줄을 잇고 있다. 흥행을 위해서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인기 가수를 초청하는 것도 다반사다. 여기에 살짝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시그니처인 피크닉 디너를 차용하면 어떨까? 야외 피크닉이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어릴 적 소풍을 생각하면 우리 추억의 책갈피에도 한 장면 있는 내용이다.
아트컨시어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