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사도광산, 1만 곳 이상 더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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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 인구 29.7% 징용 피해
탄광·공장 등 1만 1500곳 끌려가 혹사
군함도 등 빙산의 일각… 유적 훨씬 많아

국가 방관, 민간이 ‘강제 연행·노역’ 알려
우익 공격 맞서 후대에 아픈 역사 전해

한국, 유네스코 등재 때 일본 왜곡 용인
“대통령, 부산 강제동원역사관 방문을”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佐渡)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강제’ 노역 표기 누락이 한국 정부의 용인 속에 이뤄진 것으로 드러나 비판 여론이 거세다. 한국 외교부가 ‘강제’ 표현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이 거부했고 결국 인근 아이카와(相川) 향토 박물관에 징용 조선인 전시를 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박물관 안내판에는 한반도에서도 징용제가 실시됐고,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힘든 일에 내몰렸다는 서술이 있으나 결국 강제성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군함도에 이은 역사 인식의 후퇴를 한국 정부가 자초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투입된 곳은 군함도와 사도광산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강제 동원된 곳은 탄광뿐만 아니라 공사장, 농장, 항만, 군수 공장 등 모두 1만 1500곳에 달한다. 현지 동포와 일본 양심 세력은 조선인 징용을 ‘강제 연행’과 ‘강제 노역’으로 규정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시설을 만들고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후세에 알리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일본 우익 세력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는 신산의 고비고비였다. 우경화가 급속히 진행된 일본에서는 지금도 ‘강제’ 표현을 없애려는 우익 단체의 집요한 공격이 이어지고 이에 맞서는 동포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의 저항이 진행 중이다. 만약 ‘강제’가 아니었다면 식민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이고, 이것을 우익 세력이 바라기 때문에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강제’ 표현을 스스로 포기했다. 민간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기억의 전쟁’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가담한 꼴이 됐다. 어처구니없는 이 장면을 후손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할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일본 후쿠오카현 이즈카(飯塚)시 보타산 공동묘지에 조성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 무연분묘에서는 버력(채탄 후 남은 잡돌)이 묘비석을 대신한다. 주민과 동포들은 버력 앞에서 매년 추모제를 지낸다. 부산일보DB 일본 후쿠오카현 이즈카(飯塚)시 보타산 공동묘지에 조성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 무연분묘에서는 버력(채탄 후 남은 잡돌)이 묘비석을 대신한다. 주민과 동포들은 버력 앞에서 매년 추모제를 지낸다. 부산일보DB

■ 양심적 시민·동포 “아픈 상처 전하자!”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게이센마치(桂川町)의 주택가 쌈지 공원. 추모비와 석비가 없었다면 이곳이 과거 탄광 밀집지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가한 풍경이다.

‘이곳은 1909년부터 60년간 탄광이 있었던 곳으로… 8000여 명이 생활… 전쟁이 격화될수록 노동자가 부족하게 되고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갱내에서 위험한 일에 종사됐다.’

추모비는 옛 요시쿠마(吉隈)탄광에서 갱내 화재로 숨진 조선인 25명과 일본인 4명 등 모두 29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폐광 뒤 대단지 주택가로 조성되자 과거가 잊혀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주민들이 탄광 회사에 추모 시설을 요구한 덕분에 추모비가 건립돼 아픈 상처를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됐다. 추모비 옆 석비 뒷면에 적힌 조선인 사망자 명부를 읽어 내려가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부분 20대 초반이고 가장 어린 희생자는 19세. 식민지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꽃다운 청춘들이 여기서 스러졌다.

이 지역에서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을 30년 이끌며 추모비 건립에 앞장섰던 오노 세츠코 여사는 92세이던 2018년 <서일본신문> 인터뷰에서 징용 조선인이 겪은 고초를 전했다. “잊히지 않는 이는 경북 출신의 17세 정청정 군입니다. 강제 연행되어 탄광에 온 뒤 가혹한 노동을 못 견뎌서 결국 6개월도 안돼 탈주를 감행했죠. 장시간 과로에 시달렸기 때문이지요. 식사도 충분치 않았고 폭력은 일상적이었어요.”


일본 후쿠오카현 게이센마치 주택가에 설치된 탄광 희생자 추모비(왼쪽)와 석비. 비문에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위험한 일에 종사됐다'고 새겨져 아픈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부산일보DB 일본 후쿠오카현 게이센마치 주택가에 설치된 탄광 희생자 추모비(왼쪽)와 석비. 비문에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위험한 일에 종사됐다'고 새겨져 아픈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부산일보DB

기자가 예전에 일본 규슈 지역을 취재할 때면 일부러 한반도 관련 유적을 찾았는데, 개중에는 조선인 징용의 흔적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규슈 지역에 탄광이 많았고 탄광에 동원되는 경우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출신이 다수였다.

이국 땅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귀향하지 못한 영령을 위로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남긴 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동포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이었다.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전하려 평생을 바친 이들을 만날 때면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그중 잊히지 않는 곳이 사가(佐賀)현 히젠초(肥前町)의 사찰 고묘(光明)사. 주지 스님은 사찰에서 4㎞ 떨어진 탄광에서 숨진 조선인 영령을 반백 년이 넘게 돌보고 있었다. 사찰 뒤에는 영령 51위를 기리는 추모비까지 세웠다. “제법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밤만 되면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 소리가 사찰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주지 스님이 불귀의 객이 된 조선인들의 명단까지 새긴 석비를 세운 까닭이다.

후쿠오카현 오무타(大牢田)에는 과거 광업소 세 곳에 수천 명씩의 징용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투입됐다. 주택과 공원으로 변모한 폐광 부지에 동포들이 추모비를 세웠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후대들에게 전하여 갈 것이다.’ 동포들이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을 세운 것은 아픈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남기기 위함이었다.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 탄광의 조선인 숙소 터에 동포들이 세운 추모비. 비문에는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후대에 전해 갈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부산일보DB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 탄광의 조선인 숙소 터에 동포들이 세운 추모비. 비문에는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후대에 전해 갈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부산일보DB

■ “‘강제’는 없었다!” 우익의 반격

후쿠오카현 이즈카(飯塚)시 시립묘지에 있는 조선인 무연고자 납골당 ‘무궁화당’은 우익 세력의 공격 좌표가 되고 있다. 이 납골당은 과거 지쿠호(筑豊) 지역 탄광에서 숨진 징용 조선인 중 무연고자 117위를 모신 곳. 동포와 일본 시민들이 시에 끈질기게 요구해 2000년 시립묘지 내에 ‘무궁화당’을 세우고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일본 사회의 급격한 우경화에 따라 2015년 갑자기 우익 단체가 등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문에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 각지로 연행돼… 지쿠호 탄광에서만 15만 명 이상이 가혹한 강제 노동에 투입돼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고 쓰여 있는데, 이 ‘강제’ 표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우익 단체는 “강제 연행의 실태와 숫자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더구나 정부의 견해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 시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도 시립 시설이 무상 제공되고 있다면서 시 의회를 통해 시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시립묘지에 조성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 무연분묘 ‘무궁화당’. 서일본신문사 제공 일본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시립묘지에 조성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 무연분묘 ‘무궁화당’. 서일본신문사 제공

이에 대해 무궁화당 측은 “강제 연행 등 비문 (근거)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납골당 시설은 시와 협의해서 설치 허가를 받았다”고 일축했다. 우익 세력의 집요한 공격 탓에 납골과 연례 추모제가 위축될 우려가 제기됐으나 시민과 동포들은 꿋꿋이 버텼다. 추모제도 코로나19 기간 중단됐을 뿐 2023년 10월 재개됐다.

일본의 과거사 지우기 흐름 속에 식민 지배의 ‘강제성’을 삭제하려는 역사 공세가 강화되자 양심 세력은 힘겹게 진실을 지키고 있다. 이는 비단 무궁화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전역의 조선인 강제 동원 역사·추모 시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즉, 윤석열 정부가 ‘강제’를 포기한 것은 사도광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우경화 세력의 논리에 보조를 맞춤으로써 일제 지배 정당화 논리에 들러리를 선 것인데, 이는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전하려던 양심 세력의 장기간에 걸친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부산 남구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 탄광 모형. 입구 안내판에는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고, 결국 성한 사람은 몇 명 안 남았다'는 징용 피해자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부산 남구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 탄광 모형. 입구 안내판에는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고, 결국 성한 사람은 몇 명 안 남았다'는 징용 피해자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 조선인 29.7% 강제동원 피해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 인구는 2636만 1401명. 이 중 징병·징용·군무원·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이는 782만 7328명(29.7%)에 달한다. 인구 10명 중 3명이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인류사에 보기 드문 가혹한 식민 지배다. 이 때문에 2010년 ‘강제동원지원특별법’이 시행되고 2015년 부산 남구 대연동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개관했다. 부산이 역사관 입지로 정해진 것은 규슈 탄광의 노무자 동원이 경상도에서 상당수가 이뤄졌고, 부산항이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관 전시물 중 징용 조선인들이 혹사당했던 탄광 모형이 있는데, 입구에 증언록을 전시하고 있다.

“(오전) 7시에 시작하고 (오후) 7시까지 12시간 일 해야 돼. 굴을 비우지 않고 3교대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일을 해요. 나올 때 성한 사람은 몇 명 안돼. 다리가 잘렸다, 손이 잘렸다, 어디가 깨졌다…. 부상자가 3분의 2는 돼.”

이런 가혹한 노역이 이뤄진 곳은 규슈의 탄광 지대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의 공장, 농장, 공사장 등 1만 1500곳에 달한다. 군함도와 사도광산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광산 두 곳에서 ‘강제’를 감춘다고 해서 감춰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부산 남구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4층 상설 전시실 동선의 끝은 '끝나지 않은 일제 강제동원'을 상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부산 남구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4층 상설 전시실 동선의 끝은 '끝나지 않은 일제 강제동원'을 상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윤 대통령, 부산 강제동원역사관 방문해야

일제 강점기 시절 인도주의에 반하는 과거사에 대한 인정과 반성은 1995년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로 요약된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지금 일본 정부는 반성과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외면한 채 과거사에 대해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한다. 그 연장선에 군함도가 있고 사도광산이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무라야마 담화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한데, 되레 일본 역사 왜곡의 길을 터주는 모양새를 자초했다. 한마디로 외교 참사다.

광복절을 코앞에 두고 정부가 임명한 독립기념관장에 대해 광복회가 뉴라이트 계열이라며 부적절성을 주장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사 인식은 국민 눈높이를 벗어났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래서, 79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통령께 간곡히 제안 드린다.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방문해서 징용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록물을 살펴 보시라. 4층 상설 전시실 마지막 코너의 제목은 ‘끝나지 않은 일제 강제동원’이다. 왜 강제동원이 아직 현재 진행형인지 곱씹어 보시길 부탁 드린다. 일본 우경화 세력에 동조화되는 대일 외교 행보에 대해 언짢음을 느끼는 국민들이 왜 많은지 해답을 찾으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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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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