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멈춰 선 1년
논설위원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1년
‘면죄부성’ 경찰 수사 결과 논란
다시 이목 쏠린 특검 법안 향방
대통령 또 거부권 ‘무한 도돌이표’
수사 외압 대통령 부부 연루 의혹
사적 이익의 국정 개입 해명돼야
오는 19일은 채 상병 1주기다. 채 상병은 지난해 7월 수해 현장 실종자 수색에 안전 장비 없이 동원됐다가 급류에 휩쓸렸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 1년이라는 세월은 정지된 시간이었다. 채 상병 어머니는 1주기를 앞두고 간곡한 마음을 담은 탄원서를 경찰에 보냈다. ‘아들이 희생된 원인과 진실이 꼭 밝혀져 이후에는 아들만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안일하게 대처한 군 지휘관이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탄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채 상병 순직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꼽혔던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다. 요지는 이렇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은 안타까운 사건이다. 하지만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그 사건으로 지휘관들을 처벌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언급한 ‘군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이 뒤따랐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들입니다.’
경찰은 결국 임 전 사단장의 주장 대부분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8일 경북경찰청이 발표한 최종 수사 결과는 피의자 9명 중 임 전 사단장과 하급 간부 2명은 검찰 송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 임 전 사단장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월권’은 맞지만 ‘직권남용’은 아니라는 논리였고, ‘업무상 과실치사’ 책임은 현장 지휘관들에게만 돌아갔다. 이를 납득할 만한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1년을 끌어온 경찰 수사가 끝내 면죄부로 마무리됐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제 모든 이목은 ‘채상병특검법’으로 향한다. 특검의 취지는 채 상병 순직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국방부 등이 진상 규명을 방해했다는 의혹을 밝히는 데 있다. 이 특검법은 21대 국회 막바지인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와 국회 재투표를 거쳐 폐기된 바 있다. 22대 국회가 열리자 다시 상정된 특검법은 지난 4일 표결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예상대로 윤 대통령은 9일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특검법이 국회에서 재의결되려면 출석의원 3분의 2(200명) 이상 동의가 필요한데 가능성은 높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타협과 협상의 기대마저 버릴 순 없다. 열쇠는 윤 대통령이 쥐고 있다. 총선은 물론 각종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민심은 분명하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특검 찬성 응답률이 꾸준히 60~70%를 유지하고 있고, ‘수사 과정에 외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국민도 57%에 달한다. 지난달 20일부터 시작한 대통령 탄핵 국민청원은 이미 동의자 130만 명(8일 기준)을 넘어선 상황이다. 대통령이 특검에 ‘적반하장’ 식 태도로 일관한다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것이다.
채 상병 특검의 취지는 단순하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간단하지 않다. 순직 사건의 진상 규명을 넘어 국가 운영 시스템에 사적 이익의 추구와 욕망이 개입된 위태로운 사태를 밝히는 일과 관련돼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임 전 사단장 지키기의 배후에 김건희 여사가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마당이다. 이번 경찰 수사 결과 역시 수사 외압 의혹 자체를 사전에 무력화하려는 의도의 산물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는 체제다. 그러나 그 사적 이익이 정당한 명분을 지니려면 모두에게 공평한 여건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국가다. 개인의 욕망이 빚는 갈등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지 않도록 구성원의 욕망을 통제하고 타협의 지점을 찾는 일. 공공성 실현의 도구가 국가인 것이다. 그 맨 꼭대기 자리에 통치권자가 있다. 따라서 그는 앞장서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일찍이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이를 꿰뚫고 있다. 정치의 본질은 사람들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익을 잘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부(재산)를 놓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정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통치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 그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파다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국방 등 모든 분야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아우성, 공공 영역이 대거 축소되고 그 자리가 사적 이익의 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한탄이다. 대통령으로서 견지해야 할 공적 잣대가 부부, 가족, 지인 같은 사적 인연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은 아닌가. 채 상병 1주기, 국정 퇴행의 1년이 그렇게 묻고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