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엘레지, 슬픈 노래의 힘
음악평론가
초등학교 시절, 당시에는 ‘전축’이라 부르던 물건이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놓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레코드를 올렸다. 몇 장 안 되는 레코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이미자의 음반이었고, 표지에는 ‘엘리지의 여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처연한 노랫가락이 아버지의 담배 연기 사이로 번져 나오던 풍경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엘레지’는 그리스어의 ‘엘레게이아’에서 유래된 말로 비가(悲歌), 애가(哀歌)로 번역된다. 죽은 이를 기리는 내용이 많았고, 죽음만큼이나 슬픈 이별과 아픔에 대해서도 엘레지라는 제목으로 시가를 만들었다. 문학에는 괴테 〈로마 엘레지〉, 셸리 〈아도니스〉, 릴케 〈두이노의 비가〉 등이 유명하고, 비슷한 정서를 지닌 음악에도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마스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포레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비외탕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등 수없이 많은 엘레지가 남아 있다.
7월 6일은 러시아의 작곡가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1861~1906)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엘레지 한 곡을 듣는다. 아렌스키는 9세 때부터 가곡과 피아노 소품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21세 되던 1882년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곧바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이 모두 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운 적 있다. 그러나 술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쳐 45세 한창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곡이 넘는 피아노곡을 포함해 무려 250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렌스키의 음악은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피아노 3중주 1번 작품32만은 자주 무대에 오른다. 1894년 발표한 이 곡은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을 지낸 카를 다비도프를 추억하며 쓴 곡이다.
이 시기에 비슷한 정서의 곡이 많이 눈에 띈다. 선배인 차이콥스키는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죽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라는 부제를 붙여 피아노 3중주 A단조를 썼고, 후배인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아노 3중주 2번을 썼다. 그래서 시기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이어주는 연결점과 같은 곡이다. 특히 ‘엘레지’라 이름 붙은 3악장 아다지오가 유명하다.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한숨과 애도의 감정이 심금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