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고개 숙인 밀양
이자영 사회부 차장
20년 전 집단 성폭행 사건 재소환에
무분별한 신상 공개·지역 혐오 확산
결국 밀양시장까지 나서 공개 사과
피해자 지원·시스템 개선 힘 모아야
20년 전 일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4년 밀양 청소년 집단 성폭행 사건 이야기다. 유튜버에 의해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일부는 신상이 공개되고 직장까지 잃을 정도로 파장이 크다. 이 과정에서 밀양은 ‘성폭행범을 두둔한 도시’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이달 들어 밀양시청 홈페이지에는 “밀양 가끔 놀러 갔었는데 이젠 가기가 무섭네요” “밀양산 제품, 특산품, 농산물 불매한다” “밀양시 이미지 실추, 시장님 고민이 많으시죠?” 같은 항의성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심지어는 ‘강간특별시’ ‘범죄 도시’ ‘믿고 거르는 도시’라는 지역 혐오 발언마저 넘쳐 난다.
결국 지난 25일 안병구 밀양시장과 시의회, 시민·종교단체 관계자 등이 대국민 공개 사과에 나섰다. 밀양시청 대강당에 80여 명이 모여 사과문을 발표하고, 고개를 숙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지자체장이 임기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닌, 20년 전 사건으로 사과에 나서는 일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건 당시 제대로 된 수사와 처벌, 피해자 지원이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한 국민적 공분이 그만큼 컸다. 특히 “밀양 물을 흐려 놨다” “신고하고 잘사나 보자”와 같은 일부 경찰, 학부모의 부적절한 발언이 재소환 되며 사람들은 또 한 번 분노했다.
그럼에도 밀양이라는 지역 자체를 ‘범죄 도시’로 싸잡아 폄하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명백한 지역 혐오다. 가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의 신상을 영상을 통해 공개하고, 이들이 생계 수단마저 잃게 될 정도로 집단적인 비난을 가하는 일 역시 옳은 처사가 아니다.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사적 제재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이번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물었다. 그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한편, ‘사이버 렉카’ 활동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렉카란 교통사고 현장에 경쟁적으로 달려가는 견인차에 빗대 조회수를 노리고 선정적 콘텐츠 짜깁기를 주로 하는 채널을 말한다.
이달 초 유튜브에 밀양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 신상이라며 영상을 공개해 논란이 된 채널의 운영자는 애초 피해자의 동의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피해자 지원 단체인 한국성폭력상담소 측은 이 채널이 첫 영상을 게시하기 전까지 피해자는 해당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전 동의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유튜버는 피해자와의 통화 내용을 목소리 변조조차 없이 공개했다. 게다가 상세한 피해 내용이 담긴 판결문도 동의 없이 게재해 문제가 됐다. 이들의 콘텐츠가 ‘정의 구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수익 창출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밀양 사건과 관련한 고소·진정도 잇따르고 있다. 유튜브 채널과 누리꾼들이 무단으로 개인 신상을 공개하거나 정보를 퍼 날라 명예가 훼손됐다는 내용, 허위 사실 작성자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 등이다. 지난 25일까지 경찰에 접수된 고소·진정만 140건에 이른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심의에 나섰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신상을 공개한 온라인 게시물과 관련해 의견 진술을 들은 뒤 제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방심위는 의견 진술 뒤 게시물에 대한 삭제, 접속 차단 등의 의결을 할 수 있다.
지난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기자 간담회에서 활동가가 대독한 피해자 자매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가끔 죽고 싶을 때도 있고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미친 사람처럼 울 때도 있고 멍하니 누워만 있을 때도 자주 있지만… 이겨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얼굴도 안 봤지만 힘내라는 댓글과 응원에 조금은 힘이 나는 거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란 걸 느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이들은 또 “잠깐 반짝 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길 바란다”며 “경찰, 검찰에게 2차 가해 겪는 또 다른 피해자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제는 가해자의 신상을 털고 이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일보다는 피해자의 일상 회복 지원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피해자의 생계 지원을 위한 긴급 모금에 나섰는데, 26일 기준 3000여 명이 참여해 1억 1700여만 원이 모였다. 밀양시 성폭력·가정폭력 통합상담소도 이달 말까지 피해자 회복 지원을 위한 성금을 모금해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피해자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이 사건이 잠깐 타올랐다가 금방 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밝힌 바 있다. 밀양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한때의 이슈로 끝나지 않고, 피해자 구제와 시스템 개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