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누가 청년들을 '그냥 쉬게' 만드는가
장현정 ㈜호밀밭 대표이사
구직 단념하는 무직 젊은 층 많아
나아질 거란 희망 없는 게 주원인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환경 필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믿음 안겨야
부산, 신뢰자본 풍부한 도시 되길
지난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에 “그냥 쉰다”는 청년이 무려 40만 명이나 된다. 멀쩡한 청년들이 도대체 왜 ‘그냥 쉬고’ 있는 걸까. 게을러서? 노는 걸 좋아해서? 그렇게 피상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당신은 게으르다. 희망이 없으니 차라리 그냥 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지 오래인 그들이다. 열심히 일하면 정말로 미래가 달라지는가? 노력하면 정말로 그만큼 보상받게 되는가?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하던 시절은 사실 오래전에 끝났다. ‘노오력’은 진즉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청년들만 이런 포기와 체념의 정서에 젖어있는 게 아니다. 당장 부산의 대표적인 상권이라는 금정구 부산대 앞이나 부산진구 서면에 나가보면 자영업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거리 곳곳에서 빈 점포들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영업이 극히 부진해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는 가게도 많다. 이 정도면 상권 붕괴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영업자들은 또 왜 그만두는 걸까.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생활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역에서 더욱더 심각하다. 지방소멸의 위기감 앞에서 전국의 지자체들도 최선을 다해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왜 잘 안되는 걸까. 왜 2% 부족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 걸까. 아마도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업화 시기에 매력적인 도시는 일자리가 많은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나의 노력이 그만큼의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더 중요해진 시대다. 화폐나 토지 같은 물질적 자본의 가치도 교양, 이야기, 관계 등으로 구성된 비물질적 자본의 가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이런 비물질적 자본의 핵심에 ‘신뢰’가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매력적인 도시는 단순히 일자리가 많은, 돈만 많은 졸부 같은 도시가 아니라 개방성과 다양성이 보장된 환경에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신뢰자본이 풍부한 도시라는 얘기다.
이는 비단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수백 년 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의 결과로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혁신을 선도했다. 수십 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밸리도 신뢰를 기반으로 모인 창의적 인재들로 역사를 바꾸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성공한 도시라면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한 만큼 보상을 받으리라는 믿음, 즉 도시의 신뢰자본이 탄탄했다. 이때의 보상이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적 인정, 지위, 존경 등 다양한 비물질적 보상도 포함된다.
지금의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돈 발렌타인은 1972년 벤처 투자회사 세콰이어 캐피탈을 창업하면서 “나무보다는 그 나무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큰 땅을 만드는 게 먼저”라고 했다. 그가 초기에 투자한 회사들은 실제로 큰 땅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애플, 구글, 유튜브, 엔비디아, 페이팔, 에어비엔비 같은 글로벌 회사들이다. 핵심은 신뢰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신뢰가 구축되면 ‘그냥 쉬던’ 청년들도 기꺼이 몸을 일으켜 다시 사회로 나올 것이다. 줄줄이 폐업하던 자영업자들도 다시 힘을 내 일상을 꾸려갈 것이다.
부산도 이 격변의 시대에 한 단계 도약하려면 경제적 자본만큼이나 문화자본, 나아가 신뢰자본을 적극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만났던 재능 있는 청년들 중 상당수는 아쉽게도 부산을 떠났다. 지역에서 열심히 해도 인정받기 어렵다고, 어쩌다 일이 잘 돼도 공을 가로채려는 사람들만 가득하다고 한탄하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프게 떠오른다.
당장 ‘법정 문화도시’ 1기로 그동안 전국의 주목을 받으며 큰 성과를 보여준 영도문화도시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업을 마무리한다고 들었다. 이후에 어떤 모습으로 이 성과들을 이어갈 것인지도 주목된다. 열심히 해도 남는 게 없다는 경험이 반복되면 지역 청년들은 한창 인생을 갈아 넣어 경험을 쌓고 실력도 길러야 할 황금 같은 시기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체념한 채 ‘그냥 쉬는’ 길을 택할 것이다. 신뢰자본 도시 부산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