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전문가 집단의 배신
논설위원
지식·경험에 권위 갖춘 전문 직역
사회 내 의사 결정 과정 핵심 역할
무형의 신뢰 자산 축적에도 기여
집단 휴진 의사·정치 개입 검사
공동체 위 군림하려는 일탈 행동
단죄·반성 없으면 퇴행 거듭할 뿐
독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 토대 위에 법과 제도, 문화 등 상부 구조가 서 있는 사회 체제를 상정했다. 마르크스가 물질적 조건에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을 찾았다면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말의 씨줄과 날줄에 주목했다. 공론장에서 의사소통 행위가 이루어지고 사회 변동이 추동된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는 공론장의 진화에 조응하며 발전했다. 공론장이 집단 지성의 산실이 되어 공동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조건 중 하나가 지식과 경험에서 권위를 가진 전문가의 존재다. 전문가는 의제 설정과 심층 분석,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신뢰가 싹트는데 이는 공론장이 건설적인 토론과 합의의 장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된다.
‘짐이 곧 국가’인 군주제나 군부 독재, 공산당 일당 체제에서는 통치자의 하명이 일방통행으로 전달될 뿐 상호 소통은 생략된다. 이런 나라에서 전문가 집단의 존재감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론장이 가동되는지 여부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는 간단히 구별된다.
근대 국가 초입에 다양한 전문가 조직이 ‘협회’의 이름으로 태동했다. 정치 국가는 시민 사회에서 움트는 전문가 집단을 관리·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고안했다. 대학에 정규 교육을 맡기고, 국가 자격증 혹은 면허 체계에 연계시켰다. 전문직은 해당 분야의 배타적 독점권을 누리는 조건으로 정치 국가에 포섭된다. 전문직주의(프로페셔널리즘) 탄생의 과정이다.
하버마스는 전문가 집단의 권위주의화를 우려했다. 조력자 역할을 뛰어넘어 공동체를 쥐락펴락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독선으로 치달으면 ‘입틀막’(입 틀어 막기)이 나타난다. 과거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사 엘리트 집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부 독재를 실시했던 게 최악의 사례다.
이처럼 전문가의 조직적 일탈은 드물지 않다. 사회 전체의 이익, 즉 공공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집단 이기에 빠지는 ‘소셜 딜레마’ 현상이다. 최근 서울 주요 대학 음대 교수들의 입시 비리도 마찬가지다. 교수들은 자신들에게 불법 고액 레슨을 받은 수험생에 실기 전형에서 높은 점수를 매겨 합격시켰다. 전문성을 돈벌이에 악용한 집단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다. 그 결과, 입시의 공정성은 훼손되고 다수의 학생들이 피해자로 전락했다.
전문직의 대표 주자는 법조·의료계다. 문학·철학과 함께 사각모의 네 모서리를 각각 대표하는 법학·의학이 학문의 틀에서 나와 가장 먼저 국가 공인 전문직 지위를 얻었다. 법조와 의료 분야의 전문직주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 취지로 강력한 법적 보호를 받는 공통점이 있다. 무면허 의료 행위나 자격 없는 법률 대리는 엄벌에 처해지는 식이다. 문제는 오늘날 이 두 직역이 한국 사회의 신뢰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명분 없는 집단 휴진에 나선 일부 의사와 ‘법 기술자’로 불리는 일부 정치 검사는 직역 이기주의라는 지탄을 자초했다.
의대 교수들은 집단 휴진을 선언하면서 환자를 외면한 단체 행동을 ‘연휴’에 비유하고 의대 증원 백지화와 전공의 면책까지 요구했다. 상식과 동떨어진 인식의 괴리에 어안이 벙벙하다. 의대생과 전공의도 법을 대놓고 무시한다. 유급과 처벌 면제의 특혜가 되풀이된 탓이다.
빗나간 우월 의식의 폭주는 검찰에서도 발견된다. ‘고발 사주’ 사건은 검찰의 신뢰에 결정타였다. 21대 총선 직전 민주당 정치인들을 고발해 달라며 고발장을 작성해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 전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당시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에 대해 1심 법원은 유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검사가 지켜야 할 핵심 가치인 정치적 중립 위반’이라는 판결처럼 검사의 선거 개입은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또 22대 총선 민심을 요동치게 만든 요인에 검찰이 수행한 사법 잣대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표가 있었던 점을 검찰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문가의 일탈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작용을 낳는다. 한 사회가 축적한 무형의 신뢰 자산을 허물어뜨리는 범죄적 행위다. 신뢰가 훼손되면 소통이 잦아들고 결국 공론장은 피폐해진다.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이 횡행하면 ‘정글의 법칙’만 남는다. 목소리 센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갈등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
‘의사 불패’, ‘검사는 처벌받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공공연한 사회는 퇴행적이다. 소시오패스적인 행위에도 반성 없이 ‘정신 승리’를 구가하며 반복하는 식이다. 공동체를 배신하고 군림하려는 전문가 집단은 단죄돼야 한다. 그게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