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의대 광풍 휩쓸면 반도체는 누가 만드나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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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대만 강진으로 TSMC 생산 차질
반도체 공급망 전략적 의미 부각

미중일, 한국 추월에 사생결단
파격 연봉, 이공계 증원 총력전

'산업 전쟁' 성패, 기술 인재에 달려
실패하면 반도체 주권국 지위 상실

지난 3일 대만을 엄습한 강진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한데, 외신이 주목한 뉴스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TSMC의 피해 여부였다. 내진 설계 덕분에 웨이퍼 팹(fab·반도체 생산공장)은 사흘 만에 복구됐다.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린 곳도, 불안감이 더 커진 곳도 미국이다. 미국이 전 세계 AI(인공지능)·전기차·드론·인공위성·무기 체계 기술을 선도하지만 그 핵심인 반도체는 대만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의 5일 자 기사를 보면 반도체를 바라보는 미국의 속내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이번 지진은 세계 경제가 얼마나 대만에 의존하는지 일깨운 사건이기도 했다. 이 작은 섬에서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80~90%가 생산된다.’ 이어 기사는 ‘TSMC 붕괴라는 재난이 끼칠 영향은 대공황과 유사할 것’이라는 전문가 전망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언급된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1929~1939년 전 세계를 마비시킨 경기 침체를 말한다.

미국은 코로나19 시절 TSMC 공급 차질로 전기차 생산이 중단되는 악몽을 겪었다. 기술 강대국이지만 제조 약소국인 미국의 취약점이 노출된 사건이다. 그러니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은 반도체 공장 때문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반도체를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에 비유한 까닭이다. 하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미국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TSMC에 대해 압박과 보조금 양면 전략으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짓게 했다.

메모리 분야의 최강자 삼성전자와 HBM(고대역폭메모리) 선도 주자 SK하이닉스도 현재의 경쟁 우위에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북한과 가까운 경기 남부권 8개 지역에 분산된 반도체 단지의 입지는 미국으로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역시 미국 내 공장 투자를 대가로 거액 보조금 미끼를 내놓는 이유다.

미중 갈등의 시작은 무역 마찰이었지만 이내 기술 전쟁으로 비화됐다. 지금은 안보 패권으로 차원이 격상됐다. 그 최전선에 반도체가 있다.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영원히 따라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목표다. 그래서 제조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동맹국을 닦달한다. 동시에 반도체 내재화를 꾀한다. 생산 거점을 미국 영토로 옮기도록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미국의 왕따 전략에 맞서 중국은 과거 핵무장 때처럼 ‘거국 체제’에 돌입했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한다는 뜻이다. 국가반도체펀드 등 금전적 지원은 물론이다. 특히 공을 들이는 게 이공계 인재 육성이다.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천재 소년’ 프로젝트가 상징적인 사례다. ‘최고의 인재에 최고의 보수!’ 최대 200만 위안(우리 돈 약 3억 7600만 원)의 연봉을 걸고 기술 인재를 발굴한다.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대만은 ‘칩4 동맹’을 형성했다. 명색이 동맹이라지만 가슴에 칼을 품은 채 악수를 한 꼴이다. 특히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강국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일본 구마모토 TSMC 공장을 위해 유례 없는 세제·행정 지원에다 속도전 공사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재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은 올해부터 4년에 걸쳐 대학의 이공계 정원 1만 1000명을 증원하기로 했다. 3000억 엔(우리 돈 2조 6768억 원)의 기금도 만들었다. 한국과 대만을 꺾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국가 대항전으로 판이 커진 반도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세계 각국은 유례 없는 파격 지원책과 함께 대대적인 기술 인재 육성에 나서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9일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경쟁은 산업 전쟁이자 국가 총력전”이라고 규정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문제는 기술 인재 수급면에서 엇박자가 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이공계의 매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이공계 특성화대학 4곳(KAIST·포스텍·UNIST·GIST)의 재학생 중 10% 이상이 자퇴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상당수가 의대 진학이 사유였다. 여기에 의대 2000명 증원이 기름을 끼얹었다. ‘수학 1등급 아니어도 도전해 볼 만’ ‘의대 보내려면 강원도로 이사 가세요’…. 사교육 광풍이 불고 상위권 연쇄 이동으로 이공계 재학생들이 들썩인다. 국가 예산과 세제·행정 지원은 정책 수단으로 결정하면 되지만 기술 인력 부족 사태는 단기간 회복될 수가 없다.

미국, 중국, 일본은 사생결단으로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을 넘보고 있다. 반도체가 주권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수한 기술 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 그 출발은 이공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공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지금 정신 차려 대비하지 않으면 한국은 반도체 주권국가 지위를 잃게 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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