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4·19를 통해 5·18을 본다
논설위원
고위공직자·정치권에서도
‘오월의 정신’ 폄훼 잇따라
국내외 평가 “민주화운동”
헌법 전문 수록 자격 충분
윤 대통령 등 여권도 동의
새 국회에서 개헌 이뤄야
“오월의 정신은 우리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이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해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지난해 5·18민주화운동(이하 5·18)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낭독한 기념사 한 대목이다. 윤 대통령은 이전에도 5·18에는 각별한 자세를 보였다. 국민의힘 입당 전, 대선후보 때, 당선 첫해에도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의 정신’을 강조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김기현 전 대표,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 한동훈 현 비대위원장 등 역대 국민의힘 지도부도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보수로 분류되는 정권도 5·18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5·18에 대한 폄훼와 왜곡은 끊이지 않는다. 극우로 치부되는 세력만 그러는 게 아니다. 정부의 고위공직자나 여당 지도급 인사 중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그렇고, 김재원·김진태·김순례 전 의원 등이 5·18 폄훼 발언으로 당의 징계를 받았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는 국민의힘이 도태우 변호사를 공천했다가 ‘5·18 북한 개입설’ 등 도 변호사의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되자 공천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에는 황상무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의 5·18 폄훼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4·19혁명(이하 4·19)과 관련해서는 그런 행태를 목도하기 어렵다. 이유가 있다. 4·19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가가 끝난 사실(史實)이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어 낸 대한민국 최초의 성공한 혁명인 것이다. 이런 평가는 국제적으로도 공인됐다. 그 결과 ‘4·19 기록물’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다. 현행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3·1운동과 함께 4·19 정신이 명시된 것이다. ‘4·19민주이념’은 1962년 개헌 때 처음 수록된 뒤, 1980년 개헌 때 삭제됐다가, 1987년 개헌 때 다시 수록됐다. 헌법 전문은 헌법 제정의 목적과 지향하는 가치가 담긴 최상위 규범이다. 4·19에 대한 여타의 논란을 불허하는 건 헌법 전문이 갖는 그런 권위 덕분이다.
5·18도 정부기관이 오랜 기간 조사와 수사를 통해 그 성격과 의미를 규정해 놓은 상태다. 1995년 제정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은 1980년 광주에서의 민중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선언했다. ‘북한 개입설’ 따위는 국방부가 10여 년 전에 이미 부인했다. “5·18내란은 국헌 문란”이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민주화운동으로서 5·18을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히 인정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5·18 기록물’은, ‘4·19 기록물’보다 12년 빠른, 2011년에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큰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져 왔고, 그런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라고 명기돼 있다. 5·18 역시 4·19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평가가 끝난 셈이고, 그렇다면 5·18 정신 또한 헌법 전문에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5·18을 왜곡·폄훼하는 발언을 두고 흔히 망언(妄言)이라고 한다.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망언을 일삼는 자는 욕을 먹기 마련이고 퇴출돼 마땅해서, 특히 정치인인 경우 예외 없이 철퇴를 맞았다. 당사자들은 대개는 반성·사과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5·18 망언’은 좀체 근절되지 않는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는 주장이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도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과 관련해,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때부터 약속했으며 김기현 의원도 국민의힘 대표 시절 “당의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같은 당 유승민 전 의원은 “국민의힘에도 5·18 정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정치인이 많다”며 “개헌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올해 1월 “5·18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면서 “헌법 전문 수록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반대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미루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다. 총선 후 새 국회에서 여야가 힘을 합쳐 개헌을 추진하면 된다. 대통령과 집권여당, 거기에 제1 야당까지 공통으로 내놓은 약속이 허언으로 끝나는 건 그 자체로 국민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도출해 냄이 마땅하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