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경 칼럼]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비전도 참신한 인물도 안 보이는 공천
혐오와 조롱, 역대급 막말이 최대 이슈
민주주의 축제 아닌 전쟁터 된 총선
독해진 언어는 독해진 사회의 방증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 지도자의 언어
유머와 여유 담긴 촌철살인 그립다
22대 총선을 향한 여야의 공천이 마무리됐다.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쇄신도 비전도 참신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막말이 대신 채웠다. 그것도 역대급으로. 마치 역대급 비호감 대선의 총선판을 보는 느낌이다. 이번 총선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22대 국회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알 길이 없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북한 개입설을 입에 올리며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빨갱이로 몰고 ‘발목지뢰 목발 경품’ 발언으로 국가를 지키다 다친 병사를 야비한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직 대통령을 ‘불량품’에 비유하고 ‘서울 시민의 교양 수준이 일본인의 발톱 밑 때만큼도 못하다’며 민족의 자존까지 건드린다. ‘난교’ 이야기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차피 정치는 이해관계의 조정이고 한정 자원에 대한 최적화된 배분의 과정이다. 공천도 결국 인적 자원의 최적화된 배분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다툼도 불가피하다. 그래도 정도가 있고 명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수준이고 품격이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오가는 야만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정치 혐오를 지겹도록 경험했다. 그 말의 당사자 중 상당수는 이번 공천 경쟁에서도 살아남아 다시 국회 입성을 노리고 있다.
유권자들은 선거가 민주주의 축제의 장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사실도 정치인들이 주고받는 살벌한 언어를 통해 깨닫는다. ‘비명 횡사’ ‘공천 학살’ ‘자객 공천’ ‘저격수’ ‘선전 포고’…. 축제가 아니고 전쟁이니 등장하는 말도 죄다 전쟁 용어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는 없고 혐오와 적개심만 가득하다. 상대 진영은 ‘독재 집단’이거나 ‘범죄 집단’이고 상대가 하는 공천은 ‘막장’ 아니면 ‘패륜’이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정치권의 막말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사회 전반의 품위 손상과 정신적 타락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등장하는 각종 혐오와 증오의 말은 우리 언어 습관이 얼마나 호전적으로 변했는지 말해 준다.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또 어떤가. 언어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면 독한 말은 그만큼 사회가 독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웃음과 여유를 잃었다.
1850년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 합동연설회에서 민주당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가 정적인 공화당 에이브러햄 링컨을 이중인격자라는 터무니 없는 말로 몰아붙였다. 이에 링컨은 “내가 정말 두 얼굴을 가졌다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하고 응대해 현장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언론인 사교클럽 만찬에서 고품격 자학 개그를 선보였다. 바이든은 “이번 주 두 명이 각 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면서 “한 후보는 너무 늙었고 대통령이 되기에는 정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 명은 바로 나”라며 자신에 대한 고령 공격을 익살스럽게 받아넘겼다. 미 대선도 극단적 진영 대결과 막말이 논란이지만 간간이 전해지는 이런 유머와 여유로 우리 정치 문화와 차별화된다.
우리에게 그런 정치적 DNA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이 피란을 가는 중에도 중신들이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을 벌였다. 이에 도승지였던 이항복이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데 동인은 동해로 보내고 서인은 서해로 보내 왜군을 막게 했으면 이 난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일침으로 중신들을 부끄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회의 분열과 혐오를 막고 통합으로 이끄는 일이야말로 정치 지도자의 의무다. 2008년 미 대선 후보이던 존 매케인은 유세 도중 한 청중이 아랍인 오바마를 믿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품위 있는 가정의 시민이며 단지 근본적 이슈에 대한 의견이 나와 다를 뿐이다”고 받았다. 반대가 극심했던 이라크 파병을 늘리는 안을 지지하면서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대선에서 지는 게 낫다”고 했다는 그다.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는 지도자 정도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박광온 의원이 ‘비명 횡사’ 와중에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상대 후보 진영을 찾아 전폭적 지지를 약속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 정도가 이번 총선 기간에 본 감동적 장면이라면 장면이다. 22일 후보 등록이 마감되면 총선 레이스가 본격화한다. 선거운동 기간만이라도 막말 대신 유머와 여유가 담긴 촌철살인의 언어를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